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사후상태에 대한 신학적 고찰-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1.16) | |||
주제어 | [프랑스] 개신교 [신학자] | ||
자료출처 | 한국컴퓨터선교회 | 성경본문 | |
내용 | 현대 프랑스의 개신교 신약신학자. 1920 - 26년 빠리에서 신학과 고전어 수학. 1926-30년 스트라스부르그 토마스 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했고, 1930-38년 스트라스부르그대학의 신약학과 교회사 교수로 지냈다. 1938-49년 스위스 바젤대학 신학부의 신약과 교회사 교수 및 총장을 역임했으며, 1955년 미국에서 초빙을 받아 여러 대학과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그리스도와 시간)을 저술했다.
>> 연결고리 : 신학자 |
1. 죽음에 대한 오해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은 후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거의 예외 없이 ‘영혼불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혼불멸’이라는 것은 사람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이분설이나,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삼분설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이다. 이분설 혹은 삼분설적 인간관은 몸은 유한하고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보는 반면, 영(또는 영혼)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고 살아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몸에만 해당되는 것이며, 몸이 죽은 이후에도 영(혼)은 살아서 죽은 몸 위를 나비처럼 몇 바퀴 떠돌다가 어디론가 날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이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이며,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원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유일한 책이다. 영혼불멸 사상이 이분설이나 삼분설이라는 인간관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과연 구약 성경의 말씀도 이분설 내지 삼분설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몸(body)과 영(spirit)과 혼(soul)
몸은 죽는 것, 소멸하는 것, 유한한 것인 반면에 영(혼)은 불멸(不滅)하는 것, 그래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계속 살아서 존재한다고 보는 생각은 어느 민족에게서나 발견되는 것인데 신약시대 초대교인들과 관계되었던 헬라의 ‘영지주의’라는 사상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히브리적(구약적)인 것이 아니라 이방사상이다.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인간을 靈肉의 복합체로 본다. 인간의 육에는 음양의 氣가 공존하고 있으니 이것이 곧 혼백이다. 靈은 의식 사고로서 마음의 안식처며, 혼백은 무의식과 잠재의식으로 영의 집이라 할 수 있다. 식물인간이 되는 이유도 간단한 이치에 있다. 혼백 속에 있던 靈이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면 혼백은 모태의 상태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탄생 시에도 조산을 하게되면 혼백이 약하여 영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에 식물인간과 같아서 홀로 살아갈 수가 없게된다. 그리하여 영이 떠난 혼백을 식물인간이라고 하는데 동물은 모두가 영이 존재하는 반면, 식물은 혼백만 있고 영은 없다. 영(靈)과 혼(魂)과 백(魄)은 태어나기 전에는 각각 흩어져 있다가 죽으면 또다시 흩어진다. 혼백은 흩어지면 구천을 떠돌게되나 영은 우주 밖으로 떠난다. 영의 속도는 가공할 만큼 빠른데 광속의 48,000배에 해당한다. 간단히 말해서 생각으로 마음만 보내면 머나먼 우주나 은하계도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으니 이것이 영의 속도이다. 윤회설도 다름 아닌 동양적 영혼불멸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1) 혼(루아흐와 프뉴마/ soul)
혼이라는 구약의 말은 ‘루아흐’이다. ‘루아흐’라는 말은 동사로 불다(후~ 하고 바람이나 숨을 부는 것, 또는 바람이 부는 것)라는 뜻이며, 명사로는 ‘바람’, ‘숨’이라는 의미가 있다. 인간이나 짐승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 뿜는다. 구약의 사람들은 이 숨을 쉬는 현상을 표현하는 용어로써 ‘호흡’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으며, 나중에는 이 ‘호흡’이라는 말이 생명의 상징으로 쓰이게 되었다. ‘루아흐’의 원래 의미는 ‘바람’ 또는 ‘불다’인데 이것이 발전하여 인간의 생명 현상을 상징하는 특수한 의미를 지니는 말로 발전되어 ‘숨’, ‘호흡’, ‘혼’이라는 말이 된 것이다. 원시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로 시작된 말이 나중에 가서는 형이상학적 수준의 기술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로 특수화되어 살아 있는 피조물들은 숨을 쉰다는 뜻에서, 호흡이라는 말이 생명의 원리가 된 것이다(불다→호흡→숨→혼).
그러므로 ‘루아흐(혼, soul)’가 인간 속의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며,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능력, 옳고 그름의 차이를 분별하며,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 어떤 것을 일반화 시키기도하며 철학적인 방식의 사고를 진행시킬 수 있는 능력, 이렇게 인간을 짐승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을 상징하는 기술 용어가 된 것은 그 단어 자체에 내재된 기본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 굳어진 용법 때문이다. 루아흐에 해당하는 신약의 용어는 프뉴마이다. ‘프뉴마’ 역시 동사 ‘불다(프네오)’에서 파생된 말이다.
2) 영(네페쉬와 프시케, spirit)
구약에서 인간의 비물질적 요소를 나타내는 말로써 ‘네페쉬’라는 또한 단어가 있다. 이 말은 영으로 번역된다. 이 말 역시 숨을 쉬는 것을 가리키는 기본개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아카드어로 ‘나파수’는 ‘자유롭게 호흡하다’라는 뜻이다. 명사 ‘나피수트’는 ‘호흡,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살아서 숨 쉬는 피조물의 개별적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발전해서 이 말은 감정, 욕구, 혹은 식욕, 혹은 기질이나 기분의 의식 중심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네페쉬’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의식의 중심, 인격의 중심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의 ‘네페쉬’에 해당하는 신약의 용어는 ‘프시케’이다.
3) 몸(body)
구약 성경에는 인간의 ‘몸’을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대신에 배, 태, 등, 뼈, 넓적 다리, 살등 몸의 일부분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들 가운데 ‘몸’이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바사르’인데 70인역 성경에서는 이것이 ‘사르크스(살)’와 ‘소마(몸)’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다. 신약에 와서 '몸'이라는 말은 대부분 '소마'라는 말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는데, 이 소마는 인체 뿐아니라 동물의 몸(약 3:3, 히 13:11), 식물과 우주의 발광체(고전 15:35-44), 노예들(계 18:13),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등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어떤 신약의 말씀에서는 '소마'가 '영' 혹은 '영혼'이라는 말과 구별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말씀에서는 몸이 생명이 도구 혹은 매개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몸이라는 말이 인격체로서의 사람, 곧 전인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사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너희 자신(전인)을 드리라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3.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
플라톤이 기록한 파이돈(Phaedo)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해를 발견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던 날, 제자들에게 행한 강론을 살펴볼 때 그는 철저한 영혼불멸 신봉자였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완전한 평화와 침착성 가운데 죽어 갔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에게서 죽음의 공포는 전혀 찾아 볼수 없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죽음은 육체에 갇힌 영혼을 자유하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육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철두철미하게 감각의 세계에 매여있다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죽음은 영혼의 위대한 친구이다. 이 사실을 소크라테스가 가르쳤고 그 자신이 그 가르침과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죽어갔던 것이다.
공관복음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의 심리적 상황에 대해서 대체로 똑같은 보도를 하고 있다. 특별히 마가복음 14:33은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고 심히 놀라며 슬퍼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 마태복음 26:38에서는 “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철두철미하게 인간이셨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자연적 공포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혼자 계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 결정적 순간에도 아버지를 찾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을 평화로운 한 친구와 같이 맞이했던 소크라테스의 침착성을 예수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죽음 직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막 14:36)”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친구요 해방자로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5:7에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설명하고 있다. 죽음을 직면하여 울면서 통곡하신 예수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한 것이다. 침착하고 조용히 영혼불멸을 말하는 소크라테스가 한쪽에 있고, 다른 쪽에는 통곡하며 부르짖으셨던 예수가 계시다. 장엄함과 냉정함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었지만, 예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다(막 15:37).여기서 죽음은 결코 친구가 아니다. 가장 무서운 공포가 아닐 수없다.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헬라적 사상과 성경적 사상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죽음 이후에 불멸하는 영혼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해서는 죽지 않으면 않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참 부활의 생명으로 나아오시기 위해서 진정한 삶을 중단하셔야만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의 몸을 입으시기 위해서는 전인적 몸이 완전히 죽어짐으로써 생명 자체가 상실되어졌어야만 했던 것이다. 부활은 인간의 한 부분만을 다시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멸절된 모든 것 가운데서 통전적인 인간으로 다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있어서 부활은 불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다시 살수 없는 것이며, 살아 나서도 안되는 것이다. 오직 살아야할 부분은 영혼으로써 그것은 결코 죽을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적인 부활신앙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들은 악한 것이며 멸망 받아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의 죽음이 어느 의미로든지 참 생명의 멸망이 결코 될 수 없다는 헬라적 사상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몸의 죽음은 곧 하나님께서 창조한 참 생명의 멸망이다. 성경은 우리 몸이 갖는 생명도 진정한 생명이며 사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의 멸망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부활이 정복해야 할 것은 몸이 아니라 사망이다. 몸이 자체가 악해서 죽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서 몸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헬라적 이원론은 몸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것이지만 기독교적 사상은 죄와 죽음을 문제 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하자면 영혼불멸 사상은 영지주의로 대표되는 헬라적 이원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구약적)에 의하면 몸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약적 사고를 이어받은 바울도 몸에 대한 의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몸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다. 몸은 성전, 곧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다(고전 6:19). 몸과 영혼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몸을 창조하신 이후에 선하다고 하셨다. 히브리적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몸과 영혼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원론이 아니다. 몸은 자체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다. 죄로 인하여 부패하고 썩어질 것이 되었으며, 죽음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썩지 않을 초월적인 순수한 이데아를 의식한 나머지 몸은 그 자체가 썩어져야 마땅할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했던 것이다.
신약의 인간론은 헬라적이 아니라, 히브리적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신약이 헬라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몸, 영혼, 육체, 그리고 정신의 개념에 대해서 헬라 철학자들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개념들은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헬라적 견지에서 이 개념들을 해석 할 때 전 신약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오해가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헬라적 이원론의 관점에서 볼 때 몸과 영혼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지만 신약은 이 대립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몸과 영혼 양자는 똑같은데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신약도 겉 사람과 속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요구하며, 속 사람 역시 겉 사람을 요구한다. 그러나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각각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에 의하면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로 상징되는 것이 육체적인 삶이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육체적 삶은 영혼이 연관되지 않은 몸, 육체만의 삶이 아니라, 사망의 권세, 죄의 권세를 상징하는 말이다. 그래서 육에 사로잡힌 몸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겉 사람은 후패하게 되는 것이지만, 영에 사로잡힌 우리 몸은 날로날로 새로워지고 있는 것이다(고후 4:16). 이것이 신약이 말하는 육과 영의 개념이다. 헬라적 사상은 몸과 영혼을 선과 악으로 대립시키는 것이지만, 성경적 사상은 죄의 권세, 사망권세에 사로잡힌 삶은 육체적인 삶으로, 성령과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삶은 영적인 삶으로 설명할 뿐이다.
그러면 왜 성경은 이와 같은 표현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신약은 헬라문화권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라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설명하다 보니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이 헬라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몸과 영혼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히브리적인 것이며 헬라적이지 않은 것이다. 신약은 헬라 문화권의 용어를 사용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인간론을 말함에 있어서 플라톤적 이원론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신약의 인간론은 몸과 영혼을 나누는 구조적 이원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는 이원론이다. 즉 사망과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육적인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삶을 살 것인가?라는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이원론적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중간상태
우리가 몸과 영혼을 나누는 이원론적인 인간관이 헬라적이고, 플라톤적이고, 영지주의적인 것으로써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몸과 영혼을 구별하지 않는 통전적 인간론을 받아들인 다면, 몸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남아 있다는 영혼불멸사상은 성경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영혼불명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진정한 부활, 진정한 생명은 진정한 죽음으로 부터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통전적 인간론은 인간이 사후에 부활의 시점까지 죽음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에겐 모든 생명의 활동이(감정, 느낌, 의식등 살아있는 모든 행동) 부활의 시점까지 정지된다. 그러나 죽은 자에겐 죽음의 상태가 인식되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 죽은 자 개개인은 그의 개인적 죽음의 사건과 더불어 동시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과 맞닥드려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자가 부활의 시점까지 죽음의 상태에 처해있는 이 기간을 ‘중간상태’라고 부른다.
그런데 다음의 성경구절들은 신자가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은 살아있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하는 구절들이다. 즉 영혼불멸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하는 구절들이다.
① (계 6: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②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③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④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① 계시록의 말씀은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상징적인 해석을 피해야할 말씀들이 많다. 여기서 제단 밑에 죽임 당한 영혼들이 있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법이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하나님께 열납 되었던 것처럼, 순교자들의 피가 하나님의 제단 아래 부어졌다는 상징적 의미의 말씀이다.
② 이 말씀은 영혼불멸 사상의 견지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주의 재림의 날까지 잠시 머무르는 중간장소라고 해석되어져 왔다. 천주교의 연옥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구절로 이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강도가 지금 죽음의 시점에서 주님을 영접하므로써, 지금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영생을 얻게되었다는 위로의 말씀으로 해석해야한다.
③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의 강조점은 불멸하는 영혼이 몸이 죽음과 동시에 살아서 아부라함 품에 안긴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과 지옥으로의 삶으로 연장되는 것이므로 세상에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한다는 교훈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천국과 지옥, 상과 벌이라는 견지에서 교훈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한것에 불과하다.
④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영혼불멸에 대한 기대심을 뒤 엎는 말씀이다. 분명히 영혼도 죽일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혼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영혼도 죽을 수 있다는 것, 전혀 불멸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5. 하나님 나라와 귀신에 대해서
사후에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 시점까지 중간상태에 처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천국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의 증언은 무엇인가? 또 믿지 않고 죽은 영혼이 살아 떠돌아다니다가 귀신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또 믿고 죽은 부모님의 영혼이 천국에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녀들을 내려다보면서 중보기도 하고 있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이제 하늘 나라와 귀신에 대해서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의 측면에서 살펴 보도록 하자!
1) 귀신, 사탄론
오늘 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불신자의 사후 영들이 귀신이 되어 그들의 수가 엄청나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인간 삶 속에 역사하며 질병, 고난, 재난, 사고, 살인, 음란, 폭력등 온갖 악한 일을 일으키는 것일까? 귀신과 사단(마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인간을 멸망으로 유혹하는 악한 영적 존재의 최고 우두머리를 사단이라고 한다. 이 사단을 우리말로는 마귀, 악마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의미는 대적자, 비방자, 유혹자등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단 말고도 마귀, 악마에 해당하는 여러 명칭들을 제시하고 있다. 디아볼로스(비방자), 바알세불(귀신의 왕), 벨리알(멸망, 사악함), 루시퍼(계명성, 지옥왕), 마스테마(귀신대장)등이다. 그밖에도 동의어로 악한자, 원수, 용, 뱀, 공중 권세 잡은자, 이 세상 임금, 귀신의 왕, 거짓말 장이, 시험하는 자, 참소하는 자등의 용어가 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기치는 악한 영적 존재들을 성경은 주로 다이모니온(귀신, 악령)으로 부른다. 이 다이모니온을 우리 말의 귀신, 악령, 악귀, 잡귀, 잡신, 유령, 혼령, 망령등으로 옮길 수 있다. 성경에서는 불신자의 영이 사후에 귀신이 된다고 말하는 곳이 없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신에 대한 개념과 다이모이온이라는 말이 가진 개념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탄-히브리어로 싸탄으로서 적(敵)이란 뜻임-은 인류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된 신분이 아주 높은 천사였으나 창조주를 반역하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가장 큰 적대자가 되었다. 사탄이 하나님을 배역할 때 자기보다 못한 수많은 천사들을 끌고 갔었다는 사실이 계시록 12:1-3에 나타나 있다.
타락한 천사들(악마들)은 다음과 같이 두 부류로 구분된다. (1) 활동의 자유가 허용된 것들 (2)묶여 있는 것들이다. 전자(前者)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사탄(마 12:24)과 함께 천공(天空)을 돌아다니는데, 사탄의 사자(使者)들은 그 숫자가 대단히 많아서 사실상 사탄의 세력은 편재(遍在)해 있는 셈이다. 묶이어 있는 악한 천사들(악마들)은 분명히 활동적인 악마들보다도 더욱 극악한 것들로서 탈타루스(Tartarus:벧후 2:4-한글 개역에는 '지옥'; 유 6절-한글 개역에는 '흑암')에 감금되어 있다. 요약하면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가 사탄이고, 함께 타락한 그 졸개들이 다이모니온이다. 그런데 이 사탄과 다이모니온들의 세력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히 정복되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사탄의 세력은 허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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