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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일요일로 둔갑시킨 역사. 일요일(sunday)이 주일로 지켜지기까지의 역사

생명얻는 회개 2014. 12. 18. 14:09
일요일이(sunday) 휴일(주일)로 지켜지기까지의 역사 
가톨릭의 십계명 vs 기독교의 성경속 십계명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증오가 가장 심한 곳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였다. 이방인 신자가 다수를 이루고 있던 로마의 그리스도 교회는 핍박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유대교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괄목할 만한 두 사람이 비슷한 때 로마 교회에 등장했다. 하나는 순교자로 알려진 교부 저스틴이요, 또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 이단자로 낙인 찍힌 마르시온이었다. 마르시온은 자신의 부도덕한 과거 때문에 구약과 구약의 하나님, 유대인과 안식일을 증오하였다.

 

 

유대인을 미워하던 당시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그의 이단 적인 가르침 가운데는 “안식일에 관하여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이 날에 금식” 하라는 강조도 있었다. 로마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출교시키기는 했지만, 즐겁게 보내던 안식일을 슬프게 금식하는 날로 정함으로 마르시온의 이단적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며, 역대의 감독[교황]들은 그것을 법으로 강행했다. 아무리 엄격한 유대 종파들도 안식일에는 절대 금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좋은 음식을 넉넉히 장만하여 잔치를 즐겼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안식일을 즐겁게 잔치하는 날로 보냈으며, 실제로 안식일에 금식을 강요한 로마 교회의 처사에 대해서 동방의 교회들과 암브로스 감독, 당시의 밀라노 교회 등 서방의 중요한 교회들도 이를 적극 반대했다. 안식일을 금식일로 만든 로마 교회는 그 날에 행하던 성만찬이 금식을 깨뜨린다는 명목으로 그것마저 금함과 동시에 종교적인 모임도 재제하기에 이르렀다.

 

“잔칫날이요 기쁨의 날이며, 종교적인 축제일이었던 안식일을 금식하는 날이요 슬퍼하는 날이요, 종교적인 집회가 없는 날로 바꾸어 버린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 일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로마 교회가 취한 구체적인 방편들이다. 반면에,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조치 때문에 사람들은 안식일의 금식이 지난 후에 모여서 일요일을 기쁨과 축제의 날로 드높이게 되었다.”

 

19세기 루터 교의 교회 역사가인 네안더는, “동방 교회에서는 안식일에 금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었다.”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 교회의 여러 교회들 특히 로마 교회와 스페인 교회는 유대인과 유대주의자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안식일을 금식하는 날로 지키도록 이끌어 나갔다.” 로마 교회의 이러한 적극적일 노력 때문에 안식일은 점점 어두운 그늘 속에 가려지게 되었고 일요일은 각광을 받는 축제일로 부각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태양의 날

쥬이트(Jewett)의 말처럼 2세기의 교부 저스틴(Justi Martyr)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억지로라도 나의 군주인 안토니우스 황제(Antonius Pius)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로마 제국의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높이기 시작한 태양신을 위해서, “태양의 날”(일요일. tje day of Sun)이라는 명칭을 그의 변증서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그리스도교의 저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안식일을 철저히 부정하고 경멸하는 한편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격상(格上)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킨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아래에 인용된 일요일 성수론자 쥬이트의 설명은, 이교도의 숭배 대상 이였던 태양이 어떻게 그렇게 쉽사리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Sunday)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자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말이 빛을 상징하는 표현이라는 입장에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 창조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도 일요일이라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일 중 첫째날에 빛을 만들었다는 것과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사실을 강조하였다. 찬란한 영광 중에 승천한 후 그리스도는 지금 그분의 진리로 우리를 비치고 있고 영원토록 우리의 빛이 되기 위해 재림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일요일에 재림한다는 전통이 세워지자,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에 서서 기도를 하되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하게 되었다. … 서기 4세기 이후로 일요일이란 명칭은 그리스도교의 용어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쥬이트의 설명은, “밤의 어두움을 쫓는…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드린다” 는 2세기말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트(Clement . A. D 150-215)의 진술로 뒷받침 된다. 그리고 “해뜰 떼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기도하고…해질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기도할 것” 을 권면한 3세기의 칼타고 감독 키프리안(Cyprian .d A. D.258)의 기록도 일요일 숭배의 기원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은 일반 자연신교에서 태양을 숭배하게 된 과정과 매우 흡사한 우상숭배적인 예배 현상이다.

 

 

로마 교회와 부활절- 일요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무에 돌아가신 성력(聖曆) 1월[니산. Nisan)14일 곧 유월절(諭越節. Passover)을 그리스도의 수난 기념과 무교절의 영적 의미를 (고전5:6-8) 새언약과 연관시켜 오랫동안 준수해 왔다(고전11:23-26). 그러나 유대인의 제1차 반란(A. D70)과 제2차 반란(A.D 132-135)이후 유대인에 대한 로마제국의 증오가 심각해지면서 마침내 유대교가 불법 종교가 되자. 안식일 준수와 함께 유월절을 그리스도의 수난 기념으로 지키는 것도 그리스도인을 유대인으로 오해시키는 구실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오해로부터 벗어나려는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안식일 대신 일요일 준수에 앞장 선 것이 로마 교회였듯이, 유월절 수난 행사 대신 부활절을 확립시키는 일에도 로마 교회가 앞장 섰다. 그리하여 2세기 중엽에 이르러 1월 14일 유월절 수난 기념일 대신에 유월절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절-일요일(Easter-Sundey)로 날짜를 바꾸어 준수하려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나타나자, 이를 반대하는 동방의 교회와 큰 충돌을 빚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 바 부활절-일요일 논쟁(Easter-Sundey Controversy)이다.

 

부활절-일요일을 반대한 쪽은 주로 사도 요한이 죽기까지 봉사한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로서 요한의 제자로 순교자가 된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카프(Polycrap . A.D.155)를 비롯하여 에베소의 유명한 감독 폴리크라테스(Po-lycrtes. A.D 130-196) 등이 있었다. 이에 맞선 로마 교회의 감독은 식스투스 (Sixtus . 116-126)를 시작으로 해서 아니케투스(Aniceyus. 154-165), 빅토르 1세 (Victor 1 . 189-199)로 이어졌다.

 

논쟁은 계속되었으나 유대인에 대한 로마인들의 증오심 때문에 시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서게 된 로마 교회는 오랫동안 준수되어 온 안식일과 유월절 수난 기념일 대신 매주 일요일과 매년 부활절-일요일을 그리스도교의 예배일과 명절로 확립시키는 일을 쉽사리 수행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321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의 주재로 개최된 역사적인 니케아 종교회의(the Council of Nicaea) 칙령과 함께 감독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하여 동방에 있는 교회들도 유대인과 함께 하지 말고, 로마 교회와 같은 날을 부활절로 기념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오랜 부활절-일요일 논쟁에서 로마 교회가 승리했음을 공포했다. 이러한 일련의 배경 때문에 부활절을 “로마 교회-부활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의 최대 명절이 된 부활절의 진상은 무엇인가? 영어로는 “이스터”, 독일어로는 “오스턴”으로 불리우는 이 명절은 그 근원을 전혀 성경에 두고 있지 않음을 교부들의 기록과 부활절-일요일 논쟁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은 5세기의 교회사가 소크라테스(Socrates . d 450)의 증언이다.

 

“이스터[부활절] 축제가 준수되었다는 지적이 신약 성경이나 사도 교부들의 기록 어디에도 없다 … 주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것[부활절]이나 다른 축제를 명하신 적이 없다. 이스터[부활절]도 많은 다른 관습처럼 교회가 이교의 옛 용어를 바꾸어서 들여오게 된 것이다.”

고대 잉글로 색슨족들이 봄의 여신으로 섬겨 온 “오스타라”[Ostara 혹은 Eostre)를 위하여 베풀어졌던 다산(多産)을 비는 봄의 축제(祝祭)가 “이스터” 이다. “동쪽(Ost)에서 태어나 땅의 새 생명을 가져오는 봄의 태양” 을 상징하기도 한 이 여신은 “부활절 달걀”이나 “부활절 토끼”가 드러내듯이 왕성한 생식(生殖)과 다산(多産)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봄의 여신 “오스타라”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고대 가나안의 다산의 여신 아스다롯(Astarte) 과 흡사한 비교종교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삿2:13 ; 10:6 ; 삼상7:3.4; 왕상11:5,33). 가나안의 여신 아스다롯은 고대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사랑과 다산의 여신인 “이슈타”(ishtar)와 같은 존재이다. “여하튼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은 크리스마스처럼, 고대 이교의 축제를 대신한 것임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 교회와 크리스마스

부활절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최대 명절이 된 크리스마스 역시 일요일이나 부활절-일요일처럼 태양숭배와 연관된 이교의 축제일이라는 사실이 이교의 고대 문헌에서 확인된다. 크리스마스의 근원이 된 이교의 절기는 라틴어로 “디에스 나탈리스 솔 리스 인비크티”(dies natalis solis invicti)였는데 그 뜻은 “정복할수 없는 태양의 생일”이었다.

 

“동지(冬至)가 지난 후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정복할 수 없는 항성[태양]이 다시 흑암을 이길 때인 ‘새로운 태양’의 생일인 12월25일을 축하하도륵 매우 일반적인 준수가 이루어졌다.”

 

다수의 학자들에 의하여 거듭 확인되듯이. 예수님의 탄생일을 “12월25일로 선택한 것은 이교의 행사였던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축제가 그 당시 대단히 화려하게 축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4세기의 달력[Philocalian . A.D 354]에는 12월 25일이 아예 “정복할 수 없는 자의 생일”로 명명(命名)되어 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는 페르샤의 태양신교인 미드라 종교(Mithraism)와 겨룰 목적으로 12월 25일을 택한 것으로 믿는다” 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축하한 것이 로마 교회였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달력도 발견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식(儀式)학자에 의해서도 거듭 확인되었다.

 

 

카톨릭의 증언

“평화가 이룩된 후 로마 교회는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서, 또한 그들이 이교의 축제로부터 쉽게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서, 흑암의 정복자인 ‘무적(無敵)의 태양’ 미트라(Mithras)를 영광스럽게 하는 날인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임시적인 생일로 제정하는 것이 모두에게 편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로마제국과 태양 숭배

일정한 종교가 없던 로마 사람들에게 있어서 태양은 자연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옥스포드 교회사 사전에 의하면, 로마에서 공식적인 태양숭배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67년 페르시아의 태양신인 “미드라가 소개되면서부터였으며, 2세기 말에는 콤모두스(Commodus . A.D. 180-192) 황제에 의하여 황실의 종교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버지"(father)로 불리우는 제사장들에 의해 집행되는 태양신교(Sun Cult)의 의식이 그시스도교의 성례 전들과 너무도 흡사하여, 당시의 교부 터툴리안(Turtullian)은 사단이 그리스도교의 성례 전을 그들이 모방하도록 미리 알려줬다고 할 정도엿다.

 

이토록 2세기에 들어서면서, 특별히 황제들과 군인 밎 고관들의 사적(私的)인 종교가 된 페르시아의 태양신은 “무적(無敵)의 태양”(Sol lnvictus Mithra)으로 불리우며 로마제국의 국교로 발돋움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적(公的)으로는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 218-222) 황제가 국교의 대상으로 드높인 태양신 (Sol lnvictus Elagabal)을 장엄한 신전에서 숭배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 로마는 이미 혹성신(惑星神)들의 이름을 딴 오늘날의 요일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대 문서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2세기에 이르러 이 혹성 요일의 명칭은 더욱 확산되었고 당시는 혹성에 포함되어 토성일[토요일 . the day of Saturm] 다음인 둘째 날에 배정되었던 “태양의 날” 곧, 일요일(the dat of Sun)이 2세기 초엽 토성 일을 제치고 첫번째 자리로 나오게 된 것은 태양숭배가 고조되던 시대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교도들은 일요일에 공식적인 태양숭배 의식은 행하지 않았지만 목욕을 금하고 휴식하고 잔치하는 날로 보냈던 사실을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 (Tertullian . 160-225)의 기록에서 찾게 된다.

 

2세기 중엽에는 이마 태양의 날 (日曜日)을 첫째 날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일[태양], 월[달], 화[화성],수[수성], 목[목성], 금[금성], 토[토성] 등 혹성 요일이 확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로마 초기 교부였던 저스틴(Justin Martyr)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다르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서기 155년경 로마 황제 [Pius)에게 변증서를 올리면서, 세번 씩이나 “태양의 날”을 거론하면서 이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집회하는 습관을 언급함으로써 태양을 숭배하던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사실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 교회와 일요일 준수와 태양숭배

이상과 같은 역사적 증거를 통하여 확실하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즉, 서기135년에 끝난 유대인들의 반란(바르-코게바 반란)을 계기로 유대교가 하드리안 황제에 의하여 불법 종교가 되었고 구약 성경 연구와 할례와 안식일 준수가 금지되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구별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로마 교회는 이 일에 앞장서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일을 시작했다.

 

○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 때까지 함께 준수해 오던 안식일을 로마 사람들이 선호(選好)하는 “태양의 날”인 첫째 날로 옮기기 위해서 동방 교회들의 반대를 외면하고 안식일에 금식을 강요하고 성만찬을 금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유월절 수난과 새 언약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켰던 1월[니산] 14일 대신 날짜를 무시한 채. 유월절 이후의 첫 “태양의 날”[일요일]을 부활절- 일요일로 제정하였는데 동방 교회가 반대하였지만 관철시켰다. 일요일과 함께 부활절 [이스터] 자체가 태양과 관련된 이교도의 축제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 당시에 이미 로마 민족의 신앙이 된 “무적의 태양”의 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일컫는 크리스마스와 일치시킴으로써 태양신이 누리고 있던 영광을 그리스도에게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삼았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당시의 시대적 분이기에 편승하면서 태양을 향해 기도하는 것과 같은 태양 숭배의 종교 의식 형태가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오게 되자, 그리스도인들은 “태양 숭배자”(Sun-worshiper)라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2세기말의 서방 라틴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은 이에 대해서 변명을 해야 햇으며, 5세기초의 로마 교황 레오1세(Leo 1 . d 461)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태양 숭배를 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였다. 또한 6세기 초의 알렉산드리아 교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 c. 500)도 이 사실을 기록에 남기고 있다.

 

“나는 태양을 숭배하고 그것을 향해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해가 뜰 때 그들은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한다. 이런 일은 태양숭배자들이나 이교도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을 떠나서 이교도들과 어울려 이 일을 한다.”

 

 

콘스탄틴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 - A. D 321

앞에서 언급 한대로 2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인들의 태양숭배 열이 높아지고 혹성 요일의 둘째 자리에 있던 “태양의 날”(일요일 . dies Solis)이 “토성의 날”[ 토요일. dise Saturni)을 제치고 첫째 날이 되는 등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유대인의 제2차 반란으로 로마제국에 의하여 불법 종교가 된 유대교와 구별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던 그리스도교, 특히 로마 교회가 앞장선 서방의 교회들은 동방 교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마제국의 태양숭배 분위기를 수용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때마침 동서로 나뉘었던 로마제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콘스탄틴(Constantine. d. 337)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내려서 종교 자유를 허용하는 극적인 일이 생김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잇달아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 여러가지 특전을 제공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많은 환심을 사게 되었다. 오랜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종교적 팝빅을 중단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가지 특전을 베풀었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황제는 321년 3월7일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칙령을 내렸다.

“존경스러운 이 태양의 날에 모든 판사들과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휴업하도록 하라. 그러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이 마련해 준 혜택을 상실하지 않도록 씨를 뿌리거나 포도나무를 재배하라. 농사에서 파종하는 시기와 같은 적기(適期)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일요일에도 완전히 자유롭게 농경(農耕)에 종사하도록 하라.”

 

콘스탄틴 황제가 휴업하도록 명령한 날의 대상인 “존경스러운 태양”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황제 자신을 포함하여 로마 사람들이 섬겨 온 “무적의 태양” 곧 “미드라”(Mithras) 태양신이었다. 국내에서 발간된 기독교 대백과 사전에서도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교 시대 초기에 로마 제국에서, 특히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수많은 동방 종교 가운데 하나가 페르시아로부터 수입된 미드라 종교였다. 미드라는 태양신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미드라 종교는 일요일을 성일로 간주했다. 이러한 이교의 추종자들이 이 날을 숭배한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일요일을 제국의 휴일로 선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대영 백과사전]에도 일요일이 세계적인 휴일이 되었던 역사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유세비우스(Eusebius . 260-340)에 의하면 일요일을 합당하게 준수하도록 하는 법을 최초로 제정한 사람은 콘스탄틴인데, 그는 전 로마 제국이 일요일을 규칙적으로 축하하도록 명령하였다.”

“서기 321년 그[콘스탄틴]가 일요일을 일반적인 공휴일로 선포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를 함께 마음에 두었다. “태양의 날은 이교도 추종자들에 의하여 숭배를 받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도 영광을 받았으므로 이로써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충돌 관계를 회유하고 연합시키는 것이 황제의 정책이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께 예배하고 이교도들은 그들의 태양신을 섬기는데, 두 종교의 예배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콘스탄틴의 정책과 일요일 휴업령의 진상

콘스탄틴의 기독교 개종(改宗)은 명목적(名目的)이었으며, 실제에 있어서 그는 평생동안 태양 숭배자였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도 고대 희랍과 로마의 태양신인 아폴로(Apollo)를 높이기 위해 주화(鑄貨)를 만들어냈으며 죽기까지 이교[태양신]의 대제사장의 칭호[Pontifex Maximus]를 썼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이교를 동시에 유지하려는 정책을 썼다. 이러한 콘스탄틴 황제가 휴업하도록 명령한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성일(聖日. holy day)이 아니라, 운동경기나 오락을 즐기는 세속적인 휴일(休日. holiday)에 불과했다.

 

태양의 이름으로 휴식을 명령한 이교적인 정책을 교회 지도자들이 오히려 추진하고 환영한 까닭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불법 종교가 된 유대교와 거리를 두어서 구별하고 로마 제국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저의(底意)였다. 그러나 313년 밀라노 칙령에 따라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고, 명목적으로 개종한 콘스탄틴 황제는 성직자들에게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면제하고 사법상의 특혜, 하사금 지급 등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교회의 사유 재산과 유증(遺贈)까지도 허락하는 등 정치적 배려가 깊어지자 그리스도교는 빠른 속도로 현실에 눈이 어두어진 퇴폐적인 정치 종교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성직 매매가 시작되었고, 성직 쟁탈을 위한 정치적 수단이 동원되어 366년 로마 교회 감독 다마수스(Da-masus)를 선출할 때는 폭력배들이 동원되었고, 415년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직에 나섰던 히파티아(Hypatia)가 폭력배에게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요일을 주일(主日)로 옹호하는 쥬이트(Jewett)도, “콘스탄틴이 일요일을 휴일로 지정한 것은 일요일에 대한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기술적으로 결합”시킨 것임을 인정하였고, “그의 칙령은 주일(主日)성수의 발달 과정에서만 획기적인 사건이 될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업적을 기념하는 기념비도 될 수 있” 다고 평가하였다. 이것이 주일(主日) 성수(聖守)의 발달 과정인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는 하나님의 명령은 외면하고, 속(俗)된 휴일로 지정한 콘스탄틴의 명령에 따라서 일요일을 성수(聖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일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제1차 세계 총회인 니케아 종교회의(A.D.325)은 콘스탄틴 황제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화려하게 열렸고 황제 자신이 임석하여 개회사를 하였다. 그리고 동서 교회가 부활절-일요일의 날짜 문제로 이견을 보이자 황제는 즉시 서쪽에 있는 로마 교회를 편들어서 모든 교회로 하여금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교회” 의 관습을 따르도록 명령하는 등 세속적인 황제가 교회 위에 군림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국 200년이상 계속된 로마제국의 픽박을 “죽도록 충성”(계2:10)함으로써 이긴 그리스도 교회는, 종교의 자유와 온갖 호의를 베풀면서 타협을 시도한 콘스탄틴 황제의 정책에 쉽사리 넘어간 것이다. 이것이 일요일이 안식일을 대신한 역사적 반증이다.

 

“콘스탄틴은 이 때에 옛 신앙과 새 신앙의 예배 자들을 한 종교로 연합시키기 위해 지칠줄 모르고 일했다. 그의 모든 법령과 고안들은 두 종교의 혼합을 촉진시키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합법적이고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순화된 이교와 온건한 그리스도교를 함께 녹이려 했다 … ‘태양의 날’이 일반적인 휴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명령은 그의 입장을 대표한 것이다. … 그리스도와 이교를 뒤섞고 혼합하는 그의 정책을 가장 쉽게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일요일 휴업령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온 세상이 일요일에 쉬게 된 것은 이상과 같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휴식하며 예배한 경위에 대하여 일요일 성수론자인 쥬이트는 “일요일에 일을 하지 말고 쉴 것을 제일 처음으로 분명히 언급한 저자는 2세기말의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an. 서기.200년경)이”라고 밝힌 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콘스탄틴의 칙령과 함께 시작된다. 그 칙령이 공표되자 많은 사람들은 주의 날[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을 알았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게으름이란 과중한 노동과 같이 정신적 수양에 해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의식적인 행위만 증가시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해서 구약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엄격한 금령들을 빙자하여 종교적 열성과 의무를 부과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일요일의 휴식에 대한 이 법은 시민법의 지지까지 호소하였다.“

 

 

그리스도 교회의 공식적인 일요일 준수

쥬이트의 솔직한 증언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공식적으로 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콘스탄틴의 일요일 휴업령 때문이며, 쉬는 시간적 여유를 이용하여 그때 그때 이런 저런 종교 행사들을 덧붙여 온 것이 오늘날의 일요일 예배 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부채질한 사람은 가이샤랴의 감독으로서 콘스탄틴 황제와 가깝게 지낸 교회사의 비조(鼻租)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 c. 260-340)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유세비우스는 안식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음을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게 된다.

“우리(교회)는 안식일에 관한 모든 의무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주의 날[主日]로 옮겼는데, 이는 이 날이 유대인의 안식일 보다 권위가 있고, 높이 존경을 받고, 요일의 순서에서도 첫번째이고 더 영예롭기 때문이다.”

 

이토록 참람하고 모독적인 지리를 통하여 촉진되어 일요일 준수가 마침내 364년경에 열린 “라오디게아 종교회의”(Council of Laodi-cea)에서 공식적으로 인준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그 날에 반드시 일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일요일]을 특별히 존중히 여겨야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능하면 이 날에 일하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유대인들처럼 된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1910년 1월 25일 교황 피우스10세로부터 “사도적인 축복”(Apostolic Blessing)을 받은 [회심 자를 위한 가톨릭교리 문답서]에서 아래와 같이 확인되고 있다.

문 : 어느 날이 안식일인가?

답 :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문 : 우리는 왜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가?

답 : 카톨릭 교회가 라오디게아 종교회의(AD 364년)에서 그 존엄성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겼기 때문이다. (주일제도 탄생)

 

진상이 분명해졌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제국 내의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정치적으로 연합시키는 일을 위해 일요일을 활용하였고, 로마 교회는 정치적인 권익을 제공하는 일요일을 발판으로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에 입문(入門)시켜 마침내 중세기를 지배하는 로마 카톨릭의 입지를 확보한 것이다.

 

이리하여 일요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제안한 최초의 교부인 터툴리안 (Tertu-llian . d. 225)의 말과, 안식일에는 일하고 일요일에는 쉬라고 결의한 최초의 회의인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의 결의와, “존경스러운 태양의 날”에는 일하지 말라는 최초의 법인 콘스탄틴의 칙령을 따르기 위해서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니라” (출20:11)고 이유까지 밝혀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유린해도 되는가? 그것이야말로, “너희 유전(傳統)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마15:3)하는 경우가 아닌가? 이에 관한 로마 카톨릭의 증언을 아래에 인용한다.

 

가톨릭의 십계명 vs 기독교의 성경속 십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