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 소식/북한교회소식

눈물이 펑펑납니다. 탈북한 13세 소년의 수기

생명얻는 회개 2011. 1. 17. 00:26

 

 

 탈북한 13 소년의 수기


(북한식 표현과 오자가 많아  의미상 연결이 되도록

제가 다소 수정을 했습니다. )


남조선 분들에게 드립니다.
북조선에서 도망쳐서 여기 지금 중국에서 이글을 씁니다


저의 고향은 평양입니다.

아버지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학부 선생이였고,

어머니는 김형직사범대학에서  외국어학부 선생이였습니다.

누나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기악을 배우는 학생이였습니다,

저의 가족은  평양시 동대원구역에 살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에 올라오자마자..

아버지, 어머니, 누나와 함께  정치범 관리소에 가게 되였습니다.

 

평양에 살 때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술에 취해

로동당에 어긋나는 정치적 발언을 하여 반당, 반혁명 분자로 되여 

우리집 식구들은  함경북도 명천군인가 하는 곳에

정치범관리소에  잡혀가게 되였습니다.

 

밤에 자는데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리며

사람들이 밖에서 소리쳤습니다.


아버지가 나가서 문을 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4명이

시꺼먼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아버지 가슴을 쎄게 때리더니

양쪽에서 팔을 비틀어  뒤로하여 족쇄를 채우고

두사람은  아버지를 끌고 나가고,

두 사람은  우리집을 수색하였습니다.

 

나를 방바닥에 앉으라고 하더니,  

아버지가 집에서  반혁명적 소리들을  하지 않았는가?

나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는가? 

녹음기로 라디오를 듣지않았는가?...하면서

여러가지를  자꾸 물어보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건강하지 못한데,

그때 사람들이 나가자 마자   기절하면서 쓰러졌습니다.

 

아침에 9시되어서  까마즈차가 오더니 (러시아제 화물트럭)

우리집 물건을  다 실어가고

어머니와 누나, 나는  갱생 (68년 북한산 차)에 타라고 하더니 

평양시 보위부에 싣고가  거기서 2일밤  감방 안에 있으면서

나는 그냥 있고..

어머니와 누나가 계속 불리워나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꿱꿱 소리치며  우리를 보고 머리를 들지 말고

무릅끓고 앉으라고 하더니

이것저것 물어보며  책에다 쓰는 것이였습니다.

사람 4명이 오더니  어머니와 누나를 먼저 데려 나가고,

우리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이젠 다 돌아가도 된다고 하자

그 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말하면서 나갔습니다


사무실 바닥에 혼자 앉아있는데  어떤 보안원이 오더니

나를 데리고 가더니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입고 온 옷들을  다 벗기고

거기서 죄수복을 주었는데  너덜거리고 너무 낡아서

다 구멍이 뚫리고  때가 너무 껴서  옷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10살부터 20살까지  남자아이들만 30명 있었는데

그런 반이  6개였습니다.


나는  4반이였습니다.

그날부터 가구 만드는 조에서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족은 다 갈라져서  아버지는 1구역,

어머니와 누나는  2구역에 갔는데

2구역은  강제노동을 시키는곳인데 

남자들은  벌목과 제재일을 하고, (통나무를 판자로 만드는 곳)
여자들은  농사일을 하였습니다.

 

3구역은  나이많은 사람들과 어린아이들...

밥은 하루 두끼 주었는데  한끼는  감자1개와 소금 몇알을 주고,

다른 한끼는  통강냉이 삶은 것을  한 줌 주거나..

벼 겨, 강냉이 겨를 가루내어  범벅을 만들어서

한덩이씩 주기도 했고  통밀을 삶은 것을  한줌 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반장이 자꾸만  절반씩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도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안되었습니다.

 

감옥 주변에는  풀도 제대로 나지 못하게  약을 쳐서

배가 고파도  풀 뜯을 데가 없었습니다.

 

3구역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산에서 도토리를  잘 줏거나 

송이버섯을  잘 따는 사람들은  그래도  산에서 일하면서

칡뿌리, 머루, 다래, 돌배도 먹는데

우리처럼 평양에서 살던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

관리소 안에서  시키는 일만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번씩  아버지와 우리가족을  한자리에 모이게하고

여러가지를  물어보았으며,

감시원 선생들이  아버지가 제대로 불지않는다고 하면서

우리가족이 보는 앞에서  각기목 몽둥이로  아버지를 때렸으며,

메고있는 총에서  소제대를 뽑아서 때렸습니다.


아버지가 맞을때마다  어머니는 기절하였습니다.

어머니가 기절하면  선생들은  물 한 바게쯔를 떠다가

나에게 주면서  엄마에게 부으라고 하기에

나는 무서워서 떨면서  엄마의 몸에  물을 부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때마다 소리치면  아버지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여기자료가 다 있다.. 돈 얼마를 받았어?..

안기부요원을 대라.. 너희 단체를 대라>하면서  때렸습니다.

 

너무 맞아서.. 아버지는  이빨이 남은 것이 없고,

입이 터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작년겨울.. 12월 설날 며칠 앞두고  우리가족을 모두 불러내어

1구역 안에 있는  작업장창고 앞  돌배나무에 묶어놓았습니다.

 

양복입은 사람이  동복(외투) 큰거 걸치구 나와서  앉아 있고,

다른 선생들은  옆에 서 있었는데  양복입은 사람이

다른 선생에게 가서  각기목 6개를 가져오라구 시켰습니다.

인민군이 제재소에서 켜둔  각기목나무를 가져왔습니다.


어머니와 누나, 나에게  하나씩 쥐라고하더니 
<이제부터 한마디

물어봐서 말안하면  한사람이 3대씩 힘껏 때리라> 고 하였습니다.

 

저도 3번이나 9대를  아버지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는 그런걸 모른다. 나는 당에  떳떳하다>

하면서  겨우겨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새끼..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를  발가벗기더니

마당에  광산에서 쓰는 광차가  4개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가득 채워둔 것이 얼어서  괭이로 깨더니

그 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울면서 발악하니까

선생들이 얼음속에다  엄마와 누나를 넣고 

나오지 못하게  꼭대기에서  발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선생 한명은  우리 어머니의 두 다리사이를 벌리게하고

<이년.. 까치둥지 멋있다>하면서..

엄마의 아랫도리 털을  당기면서 뽑았습니다.

 

다른 선생은 누나에게 <, 너 대학 다닐 때 아새끼들(청년들)과

몇 판 했?>하고 물으니까

누나가 울면서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습니다>하니까

거짓말 한다면서 <벌려라.. 보자, 검열하겠다>하면서 

맨 땅바닥에 눕게 하더니  다리를  하늘공중에 벌리라고 하더니

신발 신은 채로  누나의 아랫도리를 후벼대며

그리고는  각기목 몽둥이로 비비면서.. 

<쌍년.. 많이 놀았구만.  그래도 거짓말이야>하더니

<거짓말한 대가다. 너 처벌이다> 하더니

가스라이타를 크게 올리더니

<움직이면  밟아죽인다>하면서 소리치며

누나의 털에 불을 달아놓았습니다.

 


발하나는  아버지가 묶인 기둥에 묶고,

다른 발하나는  어머니의 몸과 나무에 묶고

두 손은  기둥과 광차 손잡이에 묶어 놓더니

<네간나, 오늘 걸레 만들겠다>하면서  강간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와 나에게  다른 선생들에게 말하면

너희는 그시간부터  이세상에 없을 줄 알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이래도 불지않느냐 하면서

이런 독종새끼니까  안기부 밀정한다면서

아버지를 풀어  얼음물에 잠그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순간에  아버지는 최대의 힘을 다하여

한 선생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총창을 비틀어잡고

자기 배에 힘껏 찔러  자살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또 기절하면서  머리가 돌아

다음 날  정신병자 병동에 들어가 있다가

어느 날 변소칸에서  인분을 세사발되게 먹고 죽었습니다.


누나도 잡병이 많이와서  계속 앓았는데

아버지,엄마가 죽은 후  머리가 돌아  정신이 들락날락했습니다.

 

나는 하나 남은 누나를  살려보려고

내게 나오는 음식을  몰래몰래 숨겨

제재소에 심부름갈 때마다  누나의 호실에 던져넣었습니다.

 

매일 저녁 사상개조 회의를 했는데

남자들 따로, 녀자들 따로 앉히고 공부시키다보니

누나와 나는 마주보며  소리도 내지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누나는 점점 약해져서  정말 귀신처럼 되었습니다.


머리도 어먹개처럼 (마구 헝클어짐) 깍아 놔서

어떨 때는  누나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평양에 있을 때  우리누나는 너무 고와서 (예뻐서)

화보에도(잡지) 나고,  청년문학에도 나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8월 달이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관리소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감자 밭에서 감자를 캐서 죄수들에게 주었습니다.

 

누나는 계속 앓는 데다가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있다보니

감자 캐러 나와서 경비선생의  눈을피해

생감자를 정신없이 먹었는데  그게 탈이 난 데다가

남자들이 달려드니  정신발작까지 일으킨 것입니다.

누나는  그자리서 죽고 말았습니다.


810일전인데 20일이 다 되어서야  다시감자 캐기가 시작되면서 나도  감자캐는데 나갔습니다.

밭에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밭정리하면서

누나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관리소에서는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날 화장터에 갔다가  화장해 버렸습니다.
관리소안에 화장터가 있는데  한달에 10명이 넘게 화장했습니다.


우는 것이 선생들에게 들키면  반혁명분자를 동정한다 하면서

사상투쟁무대에 세우기 때문에  우는 것이 들키지 말아야 했습니다.

 

9월부터 버섯뜯는조를 만들었는데 나도 거기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영수도 함께 다니게 되었는데  그애는 자꾸만 도망가자고 했습니다.

 

무섭기도 하고, 길도 모르고, 선생들이  총을들고 지키는데

어떻게  도망치겠는가?..고 하자

고사리를 캐는 체 하면서  저산만 넘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3년넘게  여기를 다녀서 잘 아는데

어디에  철조망이 있고  어디에 구뎅이가 있고

어디에  지뢰 묻은 것까지  다 안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보슬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사이 영수와 나는  철조망을 나무가지로 뻗치고

그 밑으로 넘어가  반대켠 산꼭대기로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보슬비가 내리면서 안개가 껴  쌍안경으로도 잘 안보일 거라하면서 등잔밑이 어둡다면서  거기로 가자고 했습니다.


산꼭대기 거의 올라 갔는데  총소리가 여러 번 났습니다.

우리가 없어진 걸 알고  찾기 시작한거 같습니다.

영수와 나는 죽을 힘을 다하여 뛰고 또 뛰어 산 2개를 넘었습니다.


관리소에서  칠보산이 가깝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살고 있는데가 어데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면서  밤이 된 다음  속도전가루 한중태기와

강냉이쌀 3킬로 되게  훔쳐가지고 나와서

한집을 또 털어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그 집에는 먹을것이 없고 배를 삶아서 찬장안에 둔 것이 있었는데

우린 영수와 둘이서  다 먹어버렸습니다.

 

영수는  기차 타면  안 된다고 하면서

길로 가지 말고  철길을 따라 가자고 했습니다.

걸어서  생기령이라는 곳에까지 왔다가

거기서  철이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철이 형은  자기 혼자서  중국에 7번이나 갔다왔고

중국에  친척이랑 아는 사람이랑  많다고 하면서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3명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철이 형이 남양교두에서 기다리다가

중국 들어가는 석탄방통에 붙자고 했습니다.


나와 영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두만강물이 깊은데  빠지면 죽는다고 하면서

정광이(광석 1차가공 분말가루 , 무산광산에서 캔 쇠돌 가루내여

청진 제철소에서  철생산하는 원료임) 중국에 많이 들어가는데

이제 정광방통이 남양역에 들어오면

거기에  동굴을 파고 숨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먼저 온성에 갔다오자고 했습니다.

 

돈을 만들자면  장마당 큰데가서 한탕해야 되는데

철이와 영수는 그런 도적질에 펄펄 날았습니다.

 
온성 주원 장마당 옆 다리밑에서 자면서 3일 동안

장마당에서 쓰리(소매치기)한 돈이 3만원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정광방통 들어오면  검사원에게 돈을주고 우리가 파고

들어간 데는 쇠꼬쟁이로  찌르지 않게끔 약속한답니다.

 

먼저 남양군 당학교 뒤산에 올라 중국 쪽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위험해도  벼랑끝에다가 나무로 벋치고

그 날밤 거기서 잤는데  영수가 태질하면서 그기둥을 차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 아래에는 철길이 지나가고  군대들의 잠복초소도 있었는데

! 소리치며 영수가 떨어지자

사방에서 전지불 (후래시)들이 달려오더니 왁작왁작 했습니다.


철이형은  내입을 틀어막으며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면서

나를 끌고  반대켠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나는 울면서  영수를 찾지 못한채  도망쳐야 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나는 영수를 부르고 또부르며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영수 때문에 살아 남았는데

이제는 내 친형이고 형제인 영수마저 죽었으니 어떻게 합니까
불쌍한 영수는 이렇게  두만강을 앞에 놓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4일이 지나서 철이형과 나는  중국 들어오는 정광방통에

숨어서  105일날 중국 안도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안도에 있는 철이형 친척은  350원주더니 집에 들여놓지 않고

거기서 뻐스를 태워줬는데  목단강 나가는  버스에 태웠습니다.


철이형과 나는  목단강에 7일날 도착했다가 다시 버스를타고

철이형이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천진에 오게 되었습니다.

 

북경에서는 위험하기 때문에  천진에서

기차를 타던지  버스를 타라고  그래서 먼데 안쪽으로 들어가라면서

철이형이 아는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조선사람 식당에서 밥먹고 나오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온  기자삼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눈앞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영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쌀밥에 고기를 배불리 먹고 있습니다.

먹으면서  항상 생각합니다.

나는 크면  꼭 복수하고야 말겠습니다.


아직은 내가 어려서 잘모르지만  중국에 와서

남조선 영화도  많이 보았고, 남조선사람도 보았습니다.

저는 크면 꼭

죽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영수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기자삼춘이 편지를 쓰라고 해서

지금 쓰는 이편지가 남조선 사람들에게 전달된다고 하니

아버지,엄마,누나 생각이 더 나면서  울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 13세 소년이 탈북, 피를 흘리며 쓴 수기 -

 

 

 

이 끔찍하고 슬프고 억장 무너지는 사실 뒤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진실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결코 이 사실들을 언제까지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민족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나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행동이전에 마음조차 없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도저히 길이 없는 인간...죄성으로 형성된 인간의 마음...
그래서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해엔 북한 인권문제가 보다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롭고 따사로운 세상이

북한에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남한의 백성들은 그 보다 낫다고 자만하지 말고
서로 자기자신을 위한 싸움을,

세상의 의로 포장하여 주장하는 위선에서 돌아서서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의 이치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깨닫게 하옵소서.
기독교인이 먼저 말입니다.
내가 먼저 말입니다.
아멘!

아~이 시점에서 눈물은 너무 사치스런 포장지에 불과함을 느낍니다.
하나님...

 

- 디아스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