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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제임스 홀 ( 로제타 ) 선교사

생명얻는 회개 2010. 3. 30. 10:17
안녕하십니까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와 로제타 선교사님의 한국 사랑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는 로제타의 미모와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윌리암 선교사는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제타도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옵니다.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 어쩔줄을 몰라하다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 '' 저 선교지를 바꿔 주시면 안되나요 ? ... ''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 월 한국 땅에 오게 됩니다.

그들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습니다.

닥터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게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현,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모교인 광성학당을 시작하면서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있는 조선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닥터 홀 선교사님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감염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홀은 ,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한국에 온지 2년만에 그는 한국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화진 죤 해론의 묘 옆에 묻혀있습니다.
홀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 로제타 선교사는 수많은 위로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 그 중, 홀의 여동생이 보낸 편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 내 사랑하는 오빠가 발진디프스의 열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아마 어떤 실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편지를 받고 우리의 희망을 사라졌어요 ....
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 나는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어요 ...
우리는 모두 어머님을 제외하고 매우 건강하답니다. 어머니는 윌리암 제임스 오빠의 죽음을 매우 힘들게 받아들이고 계셔요 ... 언니는 집으로 오려고 생각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사랑하는 어린 셔우드 홀를 보기를 원하고 있답니다. ''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대리고 임신 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나게 되었고, 얼마 후 , 윌리암 제임스 홀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대리고 다시 조선으로 왔습니다. 조선에 오자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이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하게 됩니다.
' 하나님 ,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