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로제타 선교사 와 그 아들 셔우드 선교사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사랑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는 평양에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또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후에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습니다.
박점동 이라는 한국 여자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었으며,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경성여자 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 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 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 양화진 땅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16세가 되면서는 선교사님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박에스더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 큰 쇼크를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은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정부는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재판에서 징역 3년과 5000 엔 벌금형언을 받았습니다.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 결국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는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쫒겨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은퇴하여 카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날 , 그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 광성고등학교 예베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 I,m still love Korea .....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카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 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혀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을 위해 희생의 삶이 있는 선교사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민족이 된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로제타 선교사 와 그 아들 셔우드 선교사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사랑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는 평양에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또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후에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습니다.
박점동 이라는 한국 여자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었으며,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경성여자 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 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 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 양화진 땅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16세가 되면서는 선교사님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박에스더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 큰 쇼크를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은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정부는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재판에서 징역 3년과 5000 엔 벌금형언을 받았습니다.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 결국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는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쫒겨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은퇴하여 카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날 , 그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 광성고등학교 예베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 I,m still love Korea .....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카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 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혀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을 위해 희생의 삶이 있는 선교사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민족이 된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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