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호남 선교의 7인의 개척 선교사이었던 레이널즈와 볼링 선교사 부부의 조선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1867년 10월 11일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학 재학 중 누구보다도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각종 어학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졸업 후 라틴어 교수로 근무하다가 가정이 어려움을 당하자 초등학교 교장으로도 근무하였습니다.
꾸준히 신앙생활과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 영적 성장과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선교사의 삶을 살기 위해 유니온 신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신학교 재학 중에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내쉬빌의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 연합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듣고 감동되어 선교동지인 테이트, 전킨 등과 함께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선교의 뜻을 같이하는 볼링 양과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하고, 결혼하여 ,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어학실력이 뛰어났던 레이널즈 선교사는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 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 한국말로 전도강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적응 훈련과 언어 훈련을 마친 레이널즈 부부는 1894년 3월 27일
군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임피 , 전주 ,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기 직전이어서 민심이 흉흉한데도 , 각 고을을 돌며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 강연을 하면서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갔습니다.
타고난 어학실력을 인정받아 남장로교회 선교부 대표로 성경번역 위원이 되었으며, 1910년 4월 2일 전주에서 구약성경 번역을 완수하였습니다.
또한 한영 사전 편집 책임자로 , 평양신학교 교수로, 신학지남의 편집인으로 한국 선교의 학적인 기초를 잘 쌓아 주셨습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신학자이며 어학자이고 성경번역가이자 교정지도자로서 그 업적이 무척 다양하였습니다. 한국 초기 교회사에 남긴 공헌은 물론이며 호남선교를 위해 끼친 그의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지대했습니다. 45년간의 한국 선교 사역을 마치고 나이 많아 선교사로 은퇴하여 미국에 돌아가서 84세의 일기로 소천 하였습니다.
부인 볼링 선교사도 어릴 때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선교에 열성적인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어머니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아 , 아프리카 선교사 지망을 할 정도로 선교의 열정을 지니고 준비하고 살았습니다. 레이널즈 선교사와 결혼하여 한국에 오셔서 남편의 45년간의 서울 , 전주, 평양 사역을 내조하면서 , 한국 선교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1937년 은퇴하여 94세의 일기로 소천 하였습니다.
이 두 부부 선교사는 나이 많아 은퇴 할 때까지, 한 평생을 한국 땅에 머물려 , 한국 선교의 기초를 누구보다도 튼튼히 쌓아 놓고 가신 선교사님이었습니다.
오늘은 호남 선교의 7인의 개척 선교사이었던 레이널즈와 볼링 선교사 부부의 조선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1867년 10월 11일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학 재학 중 누구보다도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각종 어학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졸업 후 라틴어 교수로 근무하다가 가정이 어려움을 당하자 초등학교 교장으로도 근무하였습니다.
꾸준히 신앙생활과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 영적 성장과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선교사의 삶을 살기 위해 유니온 신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신학교 재학 중에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내쉬빌의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 연합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듣고 감동되어 선교동지인 테이트, 전킨 등과 함께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선교의 뜻을 같이하는 볼링 양과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하고, 결혼하여 ,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어학실력이 뛰어났던 레이널즈 선교사는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 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 한국말로 전도강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적응 훈련과 언어 훈련을 마친 레이널즈 부부는 1894년 3월 27일
군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임피 , 전주 ,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기 직전이어서 민심이 흉흉한데도 , 각 고을을 돌며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 강연을 하면서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갔습니다.
타고난 어학실력을 인정받아 남장로교회 선교부 대표로 성경번역 위원이 되었으며, 1910년 4월 2일 전주에서 구약성경 번역을 완수하였습니다.
또한 한영 사전 편집 책임자로 , 평양신학교 교수로, 신학지남의 편집인으로 한국 선교의 학적인 기초를 잘 쌓아 주셨습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신학자이며 어학자이고 성경번역가이자 교정지도자로서 그 업적이 무척 다양하였습니다. 한국 초기 교회사에 남긴 공헌은 물론이며 호남선교를 위해 끼친 그의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지대했습니다. 45년간의 한국 선교 사역을 마치고 나이 많아 선교사로 은퇴하여 미국에 돌아가서 84세의 일기로 소천 하였습니다.
부인 볼링 선교사도 어릴 때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선교에 열성적인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어머니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아 , 아프리카 선교사 지망을 할 정도로 선교의 열정을 지니고 준비하고 살았습니다. 레이널즈 선교사와 결혼하여 한국에 오셔서 남편의 45년간의 서울 , 전주, 평양 사역을 내조하면서 , 한국 선교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1937년 은퇴하여 94세의 일기로 소천 하였습니다.
이 두 부부 선교사는 나이 많아 은퇴 할 때까지, 한 평생을 한국 땅에 머물려 , 한국 선교의 기초를 누구보다도 튼튼히 쌓아 놓고 가신 선교사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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