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선교운동을 가장 먼저 일으키기는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1882년이래 일본에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을 왕래하는 한국정부 고관들을 향하여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하였다. 1883년말까지 5명의 결신자가 있었으며 1884년 말에는 20명 신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특이할만하다.(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Vol,7,P145,Vol,12,P128)
기독교로 개종한 이수정이 미국교회를 향하여 간곡한 청원으로 한국선교를 조속히 개시해 달라고 호소하였다는 사정에 관하여는 전호에 기술한바 있다. 한때 일본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자고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이수정은 반대하였다. 그는 당시의 한일간의 정치정세로 보아 아직 선교를 개시할 단계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실은 이류국인 일본으로부터 선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우가 된 일본 주재 선교사인 녹스 (George W.Knox)목사나 매클레이 (Robert S. Maclay) 목사를 통하여 미국 교회가 한국 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누차 의견을 표시하였다. 미국교회가 한국선교에 관하여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쇄국정책하에 있는 나라인고로 신중론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어서 지난날에 천주교도들이 너무나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과 현재에 있어서도 계속 정치계가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상황에서 선교사업 당사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물론 그동안에 한국의 문화가 개방되기는 하였다. 즉, 1882년 5월에 한미수호조악이 체결되었으며 그러나 그 종약문 속에 종교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지는 아니하였다. 전통적으로 선교의 자유 획득을 조약 체결의 관례로 삼고있는 프랑스 정보에서도 한불조약시에 한국의 언어 학문, 과학, 법률, 예술 등을 연구하고저 하는 프랑스 사람에게 우호적인 협력을 아끼지 아니한다는 조문을 삽입했을 정도이었고 종교적 문제는 거부당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태임에도 한국인으로부터 직접적인 선교의 청원을 접수하게 되자 미국교회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주재 선교사 녹스 목사가 북장로교 선교 본부에 보낸 글은 선교 적극추진론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한국사람들은 서양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동경 안에도 영어와 서양기술을 배우려고 하는 유학생이 30명이나 있다. 그중 2 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모두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국을 위하여 지체하지 않고 선교를 전개해야 한다. 목사 2명과 의사 한사람만 있으면 된다. 의사는 개척지이고 학교는 세우기만하면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명년 봄까지는 반드시 선교사가 한국 땅에 들어가야 한다] 중국에 있는 선교사 중 리이드(Gillert Reid) 는 1884년 4월 14일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나는 한국선교의 즉시 개시를 희망한다. 선교사로는 목사보다 먼저 교사와 의사가 사업에 착수해야 한다. 금년 가을에는 그러한 사람을 2명만 파송해 주기 바란다. 상업이 먼저 들어가고 선교가 뒤떨어져서야 되겠는가, 서둘러 주기 바란다.] (The Foreign Missionary for August,1884,PP.131-132)
이쯤되자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본부 안에서 선교의 즉각 개시를 주장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대두되었으며 선교본부 위원중의 한사람인 맥윌리암스(David W.Mcwillams)는 5천달라의 대금을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름으로 기탁하였다. 이일을 계기로 여러 기증자들이 속출하여 한국선교 기금은 불어나게 되었다.
때를 전후하여 한국선교를 희망하는 인물도 나타났다. 그가 바로 혜론 (John H. Heron) 의사로서 그는 1884년 봄 한국을 위한 최초의 미국 북장로교 파송의 선교사로 선발되기에 이르렀다.
- 출처 : http://yehwa.org ⓒ채수덕
그들은 1882년이래 일본에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을 왕래하는 한국정부 고관들을 향하여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하였다. 1883년말까지 5명의 결신자가 있었으며 1884년 말에는 20명 신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특이할만하다.(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Vol,7,P145,Vol,12,P128)
기독교로 개종한 이수정이 미국교회를 향하여 간곡한 청원으로 한국선교를 조속히 개시해 달라고 호소하였다는 사정에 관하여는 전호에 기술한바 있다. 한때 일본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자고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이수정은 반대하였다. 그는 당시의 한일간의 정치정세로 보아 아직 선교를 개시할 단계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실은 이류국인 일본으로부터 선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우가 된 일본 주재 선교사인 녹스 (George W.Knox)목사나 매클레이 (Robert S. Maclay) 목사를 통하여 미국 교회가 한국 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누차 의견을 표시하였다. 미국교회가 한국선교에 관하여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쇄국정책하에 있는 나라인고로 신중론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어서 지난날에 천주교도들이 너무나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과 현재에 있어서도 계속 정치계가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상황에서 선교사업 당사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물론 그동안에 한국의 문화가 개방되기는 하였다. 즉, 1882년 5월에 한미수호조악이 체결되었으며 그러나 그 종약문 속에 종교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지는 아니하였다. 전통적으로 선교의 자유 획득을 조약 체결의 관례로 삼고있는 프랑스 정보에서도 한불조약시에 한국의 언어 학문, 과학, 법률, 예술 등을 연구하고저 하는 프랑스 사람에게 우호적인 협력을 아끼지 아니한다는 조문을 삽입했을 정도이었고 종교적 문제는 거부당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태임에도 한국인으로부터 직접적인 선교의 청원을 접수하게 되자 미국교회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주재 선교사 녹스 목사가 북장로교 선교 본부에 보낸 글은 선교 적극추진론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한국사람들은 서양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동경 안에도 영어와 서양기술을 배우려고 하는 유학생이 30명이나 있다. 그중 2 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모두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국을 위하여 지체하지 않고 선교를 전개해야 한다. 목사 2명과 의사 한사람만 있으면 된다. 의사는 개척지이고 학교는 세우기만하면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명년 봄까지는 반드시 선교사가 한국 땅에 들어가야 한다] 중국에 있는 선교사 중 리이드(Gillert Reid) 는 1884년 4월 14일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나는 한국선교의 즉시 개시를 희망한다. 선교사로는 목사보다 먼저 교사와 의사가 사업에 착수해야 한다. 금년 가을에는 그러한 사람을 2명만 파송해 주기 바란다. 상업이 먼저 들어가고 선교가 뒤떨어져서야 되겠는가, 서둘러 주기 바란다.] (The Foreign Missionary for August,1884,PP.131-132)
이쯤되자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본부 안에서 선교의 즉각 개시를 주장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대두되었으며 선교본부 위원중의 한사람인 맥윌리암스(David W.Mcwillams)는 5천달라의 대금을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름으로 기탁하였다. 이일을 계기로 여러 기증자들이 속출하여 한국선교 기금은 불어나게 되었다.
때를 전후하여 한국선교를 희망하는 인물도 나타났다. 그가 바로 혜론 (John H. Heron) 의사로서 그는 1884년 봄 한국을 위한 최초의 미국 북장로교 파송의 선교사로 선발되기에 이르렀다.
- 출처 : http://yehwa.org ⓒ채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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