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쓰면 안 되는 용어들
1. 도로 아미타불
고생만 하고 아무 소득이 없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본래는 중이 평생을 두고 아미타불을 외우지만 아무 효과도 없다는 뜻에서 왔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는 바람직하지 않다.
2. 공염불(空念佛)
본래 불교와 관계된 말로 신심(信心)이 없이 입으로만 외는 헛된 염불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급적 이 말을 피하는 것이 좋다.
3. 보살 같다.
보살의 뜻은 ‘위로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버금이 되는 성인’이라 되어있는데 아주 성품이 좋은 사람을 일컬어 ‘보살 같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는 적합한 말이 못된다.
4.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음흉하거나 요사스러운 마음이 전혀 없고 마음이 지나치게 어질고 순한 사람을 가리켜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피해야 할 말이다.
5. 신선놀음
신선이란 도를 닦아서 인간 세상을 떠나 자연과 벗하여 늙지 않고 죽지도 않고 오래 오래 산다고 하는 초월적인 상상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편안한 삶을 가리켜 ‘신선놀음이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 쓰기에 적합한 말이 못된다.
6. 도사(道士)
어떤 일에 도가 트여서 능숙하게 해 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 도사란 본래 도교에서 도를 갈고 닦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성직자나 직분자에게 이 말을 비유하여 쓰는 것은 삼가야 한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길 찾는 데는 도사야’와 같은 말은 해서는 안 된다.
7. 신주(神主) 단지 모시듯 한다.
신주란 사당 등에 모시어 두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말하는데 글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신으로 받드는 민간 신앙에서 온 말로 몹시 귀하게 여기어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다루거나 간직하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신주 단지 모시듯 한다’ 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8. 명당(明堂) 자리
명당이란 민간 신앙의 풍수지리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후손에게 장차 큰 복을 가져다준다는 묏자리나 집터를 말하는데 이는 우리 기독교 신앙과 어긋남으로 쓰지 않아야 된다. 예를 들어 ‘여기는 정말 명당자리다’와 같은 말을 쓰는 것은 피해야 한다. ‘여기는 좋은 자리다.’ 라고 해야 한다.
9. 넋두리
민간 신앙에서 굿을 할 때 무당이나 가족의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의 넋을 힘입어 그 넋을 대신하여 말을 하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불만이나 신세타령을 길게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말을 가리켜 넋두리라 하는데 이런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10. 도깨비 장난
민간 신앙에서 도깨비란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인데 이 도깨비는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 도깨비와 관련된 ‘도깨비 장난’, ‘도깨비 짓’, ‘도깨비 불’과 같은 허무 맹랑한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1. 일진(日辰)
날의 간지(干支)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오늘의 운세를 보며, 그 날 그 날의 운세가 있다고 믿고 있다. 용례로 ‘일진이 나빠서’, ‘일진이 사나워서’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피해야 될 말이다.
12. 살(煞)
민간 신앙에서 살이란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을 말한다. ‘살이 낀다’, ‘살을 푼다’, ‘살이 내린다’ 와 같은 말들을 우리는 쓰지 말아야 한다.
13. 귀신같다(이다).
귀신을 미화해서 어떤 일을 잘 알고 있다든지 또는 아주 잘 할 경우 이를 ‘귀신같다’, ‘귀신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피해야 될 말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을 이 귀신에 비유하는 것 즉 ‘장로님이 귀신같이 알아 맞추시네’ 와 같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14. 액(厄)
액이란 ‘모질고 사나운 운수’라는 뜻인데 ‘액이 닥친다’,
‘액을 물리친다’, ‘액땜을 한다’와 같은 말은 우리가 피해야 될 말이다.
15. 운수(運數), 운(運), 수(數), 재수(財數)
운수, 운, 수는 같은 말로 사전적인 풀이는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과 기수(基數)’를 뜻하며, 재수란 ‘재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있을 운수’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말들을
피해야 한다. ‘운이 나쁘다’, ‘운이 없다’, ‘운수 사납다’, ‘재수 있다’, ‘재수 없다’ 등과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6. 사주팔자(四柱八字)
사주팔자란 ‘사람이 타고난 한 평생의 운수’를 말하며 이를 줄여 ‘팔자’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는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주팔자를 잘 타고났다’, ‘팔자가 기구하다’와 같은 말을 우리는 쓸 수 없다.
17. 터줏대감
민간 신앙에서 터주란 ‘집터를 지키는 지신, 또는 그 자리’를 말하는데 가마니 같은 것 안에 베 석자와 짚신 따위를 넣어서 달아 두고 위한다. 이 터주에 관련된 말로 집단이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을 가리켜 ‘터주대감’이라 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18. 손
민간 신앙에서 손이란 날짜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따라 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을 뜻하며 초하루와 이틀은 동쪽, 사흘과 나흗날은 남쪽에 있다고 하며, 9일과 10일에는 손이 없는 날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날짜를 따져서 ‘내일은 손이 없는 날이니 이사를 하자’, ‘내일을 손이 있는 날이니 이사하지 말자’와 같은 말들을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들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를 따르는 것도 안 된다.
19. 운명
운명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말하는데 우리는 이런 뜻을 가진 ‘운명’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명에 맡기다’, ‘모든 것이 운명에 달려 있다’ 와 같은 말을 우리는 쓰지 않아야겠다.
20. 만당 같이 깨끗 하네~
만당의 만자는, 사찰 또는 불교를 상징하는 만(卍)자
사찰의 불상 앞, 넓고 깨끗한 장소를 만당이라고 한다.
무당의 집, 무당이 섬기는 귀신의 경배장소를 말합니다.
교회 생활에서 바꿔야 할 용어들
1. 천당(天堂) ⇒ 하나님의 나라, 천국
2. 입신(入神) ⇒ 사용불가, 무당들의 용어임
3.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입니다.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5.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6. 하나님의 몸 된 교회 ⇒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8. 사도신경은 천주교 교리와 교황을 하나님으로 믿겠다는 고백이므로 하면 안 된다.
주기도문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인데 주문으로 외우는 것이므로 안 된다. 아버지를 자꾸 사용케 해서 신부(father), pope 교황아버지에 익숙해지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기에 하면 안 된다. 이교도들, 태양신 제사장들을 바알 숭배자들은 ‘아버지’로 불렀다(사사기 17: 10) (마6:7 이교풍습이라고 주문을 못하게 하신 예수님) (이 땅의 사람을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은 태양신 제사장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마 23:9)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10. 제사, 제단, 제물 ⇒ 예배로 불러야 하고, 제단. 제물 사용불가. 이는 태양신 바알숭배의식에서 나온것으로, 목회자 설교자리를 제단으로 부르는것은 태양신H 모양의 제단위에 쉐메쉬 태양신을 올려놓고 제사하던 관습에서 가톨릭이 따라했고, 그걸 우리기독교에서도 많이 사용하나 절대하면 안됨. 이는 바알풍습임
11.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12. 수양회 ⇒ 신앙수련회
13. .. 기도로 폐회 합니다 ⇒ ....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14.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15. 태신자 ⇒ 전도 대상자
16. 안집(‘안수집사’의 줄임말) ⇒ 사용불가 한국에만 있는 용어. 성경엔 집사만 있다.
17.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 주님 안에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Ⅰ. 기도와 관련된 용어 수정
1. 당신⇒ 예수님(하나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 ⇒ 기도 올립니다.
기도를 끝낼 때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길동아.”, “철수야.”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
4.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5. 사랑의 예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도 괜찮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까요.
성육신 하나님의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호칭에 대해서는 여기서 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wwwwp/743
6.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Ⅱ. 예배, 예식과 관련된 용어 수정
1.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2. 성가대 ⇒찬양대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담한 찬양대를 최근에 ‘성가대’로 많이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르는데서 보편화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聖歌隊)’가 그대로 직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의 ‘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가대’라는 용어는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하다.
3.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용불가(설교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다.
4. 대예배 ⇒ 예배, 0부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 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일요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일요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 시간별로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요일 예배라든지,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1부 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
5. 열린 예배 ⇒ 열린 집회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로 알려진 집회의 형태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초에 유행하던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혹은 구도자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기본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 하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예배가 회중지향적이 되고,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드림에 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그 예배를 통해서 얻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영혼구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집회이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차라리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많은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예배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인데, 이를 가리켜서 “열린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예배가 아니라 콘서트 같은데 어찌 예배라고 하는가?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젊은이들을 위한 예배가 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가는 좋겠다.
의미상으로도 “열린 예배”가 있다면 “닫힌 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무엇이 열린 예배이고, 무엇이 닫힌 예배인가? 또 무엇에 대해서 열려있고, 무엇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굳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기 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열린” 이라는 용어보다는 “젊은이 예배” 등으로 사용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6. 예배 봐준다. ⇒ 사용불가 '예배드린다."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업예배를 봐준다”
“구역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행위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상기케 하는 “예배 봐준다”는 표현은 예배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7. 준비찬송 ⇒ 사용불가
“찬양을 부르자” ⇒ “찬양을 드립니다“ “찬양을 드립시다“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곡을 붙인 성도들의 경배의 표현이며, 기도이며, 때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이다. (고전14:26)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열심히 찬송 부르는 것을 성도의 바른 자세로 알고 찬송을 열심히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찬송의 생활이 습관화 되다보니 때때로 찬송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준비찬송”이라는 말에서 찾아보게 된다.
교회에서 “다같이 준비 찬송을 부르면서 앞자리부터 채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런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
8. 예배 / 예식 / 기도회 ⇒ 구별사용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다.
그래서 예배와 각종 기도회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모인다.
일요일 낮을 비롯하여 일요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그리고 매일 새벽 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세계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임에 예배라는 명칭을 붙여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돌, 회갑, 추모 등의 모임에도 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배와 예식과 기도회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입당,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하고, 예배와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일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은 바벨론의 일월성신 숭배의 이름이니 성경대로 첫째 날, 둘째 날... 이런 식으로 불러야 된다.
9. 헌금 ⇒ 봉헌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 가운데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순서는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
10. 축제 ⇒ 잔치 (때에 따라 축하행사.)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으나 임창순의 東亞漢韓中辭典에서는 "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 과 Festival 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 놓고 떠들고 소리 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슷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11.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祝]자는 ‘빌 축’ 이다.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창 14:19)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
Ⅲ. 장례와 관련된 용어 수정
1. 소천(召天)하셨다. ⇒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광고에서
“고 00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교회에서 발표한 이러한 광고는 매우 부끄러운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
2.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님이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
3.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
4. 칠성판(七星板) ⇒기독교인은 사용하거나 만져도 안됨
5. 영결식, 고별식 ⇒ 기독교인은 절대하면 안됨
6. 장례예식 때 장례예배 절대 불가. 제삿날 명절에 추도예배 절대 불가.
예배는 하나님께만 경배로 드리는 것인데, 죽은 시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이므로 무당들이나 할 짓이며, 성경에도 없고,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국만의 특징인데요. 이는 천주교에서 각 나라의 무속신앙도 인정하라는 바티칸의 지시에 따라 천주교는 제사를 인정했고, 성당 안에서 제삿상까지 차려 지내준다. 또한 제삿날이나 명절에는 추도예배라 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것과 같이 예배를 드린다.
(시 106:28-30, ) 그들이 또 바알브올에게 연합하여 죽은 자들에게 바친 희생제물들을 먹음으로 그들의 행위로 그를 격노케 하니 역병이 그들 가운데 퍼졌도다. 그때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자 그 역병이 그쳤으며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살 행동은 절대 불가 합니다.
장례식에선 교인들이 합동으로 가서 고인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잘 마칠 수 있게 기도해주고, 금전적으로 돕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교인들을 붙잡기 위해 천주교식과 출애굽 때 사람들처럼 죽은 자들에게 제사하는 예배를 드린다면, 모두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꽃도 갖다 바치는 행위, 향을 피우는 행위, 모두 성막과 성전에서 드리는 분향단을 모방한 것인데, 하나님이 아닌 귀신에게 경배하는 것이므로 절대 불가합니다.
꽃 화환도 안 됩니다. 이는 누굴 위한 것인가요? 유족인가요?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장례식을 마칠 때 까지 돕는 손길과 위로의 손길만 줘야 한다.
또한 제사도 안 됩니다. 추도예배도 안됩니다. 잘못된 거짓교사들이 제사상과 제사음식은 차려주면서 전도해야지 전혀 안해 줘서 욕먹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 음식을 차려주거나 금전적으로 돕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모두 같이 처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도리어 제사를 하지 말도록 전도를 적극적으로 하면 도리어 못 오게 합니다.
(렘 7:18, 한글킹) 자식들은 나무를 모으고 아비들은 불을 지피며, 여인들은 가루 반죽을 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과자를 만들며, 다른 신들에게 술제물을 부어 그들이 나로 격노케 하였느니라.
나무만 모은 자녀들, 불을 지핀 남편, 가루 반죽한 여인들, 술제물을 부은 자들, 과자를 만든 자들 모두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사 음식을 같이 차려주라고요? 절대 불가.
7. 삼우제(三虞祭) ⇒ 기독교인은 절대 하면 안됨 유교식 장례문화
Ⅳ. 회의와 관련된 용어 수정
1. 고퇴 ⇒ ‘의사봉’이나 ‘사회봉(司會棒)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규 회의에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을 ‘고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용어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며, 한국 교회 가운데서도 장로교회에서만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회의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절차위원장이 은으로 십자를 면에 새기고 청홍으로 태극을 머리에 그리고 광채 있는 은으로 띠를 띤 견고한 ‘마치’를 마삼열 회장에게 전달했다. 회장은 이 물건이 영원토록 대한장로교 노회의 마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마치’란 이름이 속되다는 의견이 있어 회장은 기 일, 한석진 두 사람에게 이름을 개정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두 위원은 이틀 후 회의에서 ‘나무마치 퇴(槌)’자와 ‘고두’라 할 때 쓰는 ‘두드릴 고(叩)’자를 합하여 ‘고퇴’라 정했음을 보고하였고, 이것을 길선주 회원의 동의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고퇴’라는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작명되어 결의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공식적 효력을 가진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노회 창설 때 제작된 의사봉에 대한 개별 명칭으로 지어졌고, 기독교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이름이며, 장로교회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특수용어임을 고려하여, 장로회 총회의 상징적 의사봉 만을 ‘고퇴’라 부르고 그 외에는 ‘의사봉’이나 ‘사회봉(司會棒)’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2. 자벽 ⇒ 지명, 임명
교회 회의록에 종종 ‘회장 자벽’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 ‘자백’이라고 잘못 써 놓은 사례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고어에 유래를 두고 있어 현대에 와서 거의 세력을 잃어버린 말을 교회가 고수하다보니 이처럼 생소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벽(自辟)이란, 장관이 자기 뜻대로 관원을 추천하여 벼슬을 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는 <수교집록(受敎輯錄)> <조선철종실록(朝鮮哲宗實錄)>에서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벽 행위는 각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대거 기용함으로써 심각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정서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이 말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의장이 임의로 어떤 임원을 임명하는 일’로 바뀌었으나 어감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각종 회의에서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대체로 회의 벽두에 특별위원을 선정하는 경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회장의 자의임명이 불가피한 형편이라면 ‘회장 자벽’이라는 용어 대신에 ‘회장 임명’ 또는 ‘회장 지명’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
3. 증경 ⇒ 전(前)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 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네‘ 정도이므로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 ‘증경대통령’ ‘증경총장’ ‘증경사장’이라는 호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이 단어를 남용하는 실정이다.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총회장’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4. 휘장 분배 ⇒ 꽃 증정
총회나 노회에서 개회를 선포한 직후 ‘휘장 분배’라는 순서를 갖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점차 이를 생략하는 추세이지만, 역대 회장들과 주요 임원들이 일제히 단상으로 올라가 도열하면 이어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등장하여 임원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 드리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휘장(徽章)’이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표지(標識)’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익숙해진 영어 단어로 ‘배지(badge)’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회의 초반에 원로회원에게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자 배지 대신 가슴에 꽂아 드리는 꽃은 결코 휘장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순서 또한 매우 형식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분배(分配)’라는 용어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분배는 고르게 나누어준다는 뜻이므로, 원로들에게 표지를 고루 나누어주는 순서라는 의미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굳이 이 순서를 사용하려 한다면 ‘꽃 증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
Ⅴ. 교회생활과 관련된 용어
1. 당회장 ⇒ 담임목사님. 당회장(당회 회의 때)
많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당회장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예배순서를 실은 주보나 교회 게시판에 당회장 000 목사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당회 회의를 주관하는 목사를 비롯하여 노회와 총회의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모두 ‘모더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당회를 주관하는 순간에는 목사를 ‘당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그 외의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목사님’ 또는 ‘담임목사님’로 부름이 타당하다.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으로 불러야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2. 예수 ⇒ 예슈아님, 예수님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신도들은 ’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이 철저히 ’님‘자를 사용하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상의 이름만 불러도 죄가 되므로, 석가탄신일을 줄여서 석탄절이라고 부르면 타당할 듯하다.(출23:13)
성령은 성령으로 불러야지. 성령님으로 부르면 안됨.
성경엔 절대 성령만 나옴. 성령님이란 없습니다. 즉 유일신이 아닌 삼신사상에서 나온것임
유일신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성육신 하나님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호칭은 헬라식 호칭이고, 원래 히브리식 호칭은 예슈아입니다.
쉰 발음이 헬라에는 없어 예수 로 호칭됐고, 여기까지 온겁니다.
그러나 실제 예수라는 단어는 뜻이 없기때문에 구원자 되신 하나님의 뜻이 없습니다.
정확히 구원의 뜻이 담긴 호칭은 예슈아 다.
더 정확한 내용은, http://blog.daum.net/wwwwp/743 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3.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이 용어는 ‘축제’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부활절 축제’ ‘성탄 축제’에서, 축제는 ‘제사를 지내는 의미’ 이므로 쓰면 안 된다.
또한, 부활절과 성탄 모두 담무스의 부활제와 춘분축제와 동지축제에서 따온 것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바로 태양신 숭배를 하는 것이 된다.
부활절의 정확한 날자를 아는가? 누구도 모른다. 해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뜬 후 그 주일의 일요일(선데이, Sunday 태양신 숭배일)을 뜻한다. 또한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 목동들이 밖에서 지낼 정도로 따듯한 시기였으므로 12월 25일은 전혀 맞지 않다. 그것은 바벨론의 동지축제에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 이후 첫 일요일을 택하여 태양신의 부활을 동지축제로 했던 것에서 천주교가 받아들인 가짜 축제일이다.
전야제는 전날 밤에 여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종 제사가 새벽에 열리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앞날의 밤은 이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보름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의 전날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축하의 행사를 펼치기에 적절했었다. 성경에는 어떤 행사에서 전야에 모여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없다. 용어는 전야 축하 행사로 바꿔야 하겠지만 절대 저런 축하행사를 하면 안 된다.
4. 사모 ⇒ 사모님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님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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