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없는 새로운 영계
가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천국에 갈 사람들은 대개 연옥을 거친다고 합니다.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가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톨릭신자들은 연옥에 갈 준비를 평소에 합니다.
누구든지 연옥을 결국 거쳐야 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미리 미래에 연옥에서 당할 일을 미리 대비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어떤 가톨릭교도가 죄를 지으면, 그는 반드시 신부에게 그 죄를 고해를 해야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신부 곧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는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지은 자가 신부에게 죄를 고해하면 신부가 그것을 듣고, 그 죄에 합당한 몇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죄지은 자가 그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보속이라고 하는데,
죄지은 자가 그 명령대로 수행하면 죄가 용서된 것입니다.
여기서 그 명령이란 신부가 정하기 나름인데, 대개 몇가지 의식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면, 묵주기도를 몇번하라, 미사를 몇 대 봉헌해라, 주기도문을 몇번 하라 등등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명령이지만, 신부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짖궂은 명령들을 내릴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릎으로 성당을 기어서 몇바퀴 돌아라 정도의 명령은 오히려 흔한 것입니다.
물론 신부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죄사함은 없습니다.
따라서, 죄사함에 있어서 신부가 재량대로 판단하여 보속을 결정하는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므로
가톨릭교도들은 이 제사장인 신부에게 종노릇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신부에게 고해한후 신부의 명령대로 보속까지 하여 죄사함을 받아도
그 죄가 완전히 씻긴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그 죄를 100% 용서받은것은 아니고, 얼룩이 남듯이 그 죄중에 일부가 남아있게 됩니다.
이 남아있는 죄를 연옥에가서 고통당함으로써 없애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많이 남아있으면 오랫동안 연옥에 머물게 되고, 죄가 적으면 그 기간이 줄어듭니다.
그 기간이란 한정이 없습니다. 수백년은 기본으로 보아야 됩니다.
따라서, 기가막힐 노릇이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신부에게 죄를 고해도, 또 신부의 명령을 수행해도 죄는 100%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승에서의 삶의 기간보다 오랜기간을 연옥의 불속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부에게 고해하고 보속을 행해야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부에게 고해하지 않고 보속을 행하지 않으면, 연옥이 아닌 지옥에 가게되기 때문입니다.
즉, 고해와 보속을 행하면 지옥에 가지 않을 정도로는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연옥에 가는 운명은 면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맙게도(?) 가톨릭은 고해성사와 보속을 수행한 이후에도 남게된 죄를
더욱 줄일 수 있는 다음단계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사입니다.
대사란, 가톨릭 교회가 죄인의 죄를 사면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죄인에게 대사를 주기위해 죄인에게 몇가지 행동들을 요구할때 죄인이 그 행동을 수행하면,
그 죄인에게 교회가 주는 대사가 적용됩니다.
따라서 그 죄인은 죄를 더욱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가톨릭이 대사를 위해 죄인에게 요구하는 행동이란 다름아닌
신부에게 돈을 내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신부에게 돈을 내면 대사가 적용됩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면죄부를 산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준다는 핑계로 사람들의 재산까지 갈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대사를 얻는 방법으로 돈을 내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은 기도나 선행도 대사를 얻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변적인 것이고, 사실은 대사란 실제로 돈을 냄으로써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교도들이 신부들에게 미사때마다 부지런히 돈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해-보속-대사를 모두 거쳐도 죄가 완전히 없어진것이 아닙니다.
연옥에 머물러야될 기간을 상당부분 단축시키긴 하였으나,
역시 연옥의 불속에서 오랜동안 살아야 됩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가톨릭은 죄를 더욱 없앨수 있는 방법을 또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대사는 죄를 가져가지만 죄가 야기시키는 모든 부조화를 다 치료해 주지는 못한다.
죄에서 건져냄을 받은 죄인은 완전한 영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
죄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행위를 더 해야 한다. 자신의 죄들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
이러한 보상을 '참회'라고 부른다."-가톨릭 교리문답서
가톨릭의 참회란 자기 스스로 뉘우침으로써 영적 상태를 바로잡아 죄를 경감시키는 것입니다.
참회의 방법은 죄를 용서받기위해 자기자신을 스스로 해하는 것, 즉, 자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참회의 방법으로 자해만 있는 것은 아니고,
가톨릭은 기도나 남을 돕거나 돈을 내는것도 참회의 방법으로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또 실제로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 교도들에게 뉘우침, 즉 참회의 방법으로써 더 선호되는 방법이지요.
그러나 가톨릭 역사에 있어서 참회의 방법으로는
채찍으로 때리고 살을 파고드는 사슬을 몸에 매고 다니는 등의
육체적 형벌이 주로 이용되어온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즉, 대사가 주로 돈을 내는 의식으로 이어져온 반면에,
참회는 주로 신체적 고난의 의식으로 이어져온 것입니다.
이렇듯 가톨릭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가톨릭이 요구하는 온갖 행동들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막히는 것은
고해-보속-대사-참회를 모두 행해도 연옥을 면했다고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제사(미사)에 참석하고 고해하고 보속하고 대사하고 참회하는 것을 계속 되풀이해야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자신이 천국으로 직행할지 연옥을 거칠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약, 제사에 참석하는 것과 제사장에게 고해를 계속하지 않으면,
연옥도 아닌 지옥으로 가게 되므로 일단 계속 반복해서 행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연옥"행을 면하기 위해서 이렇듯 쓸데없는 고생들을 일일이 행해야 됩니다.
가톨릭의 "자선"이라는 것도 결국 연옥을 면하기 위해서 행해야하는 의무로써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습니다.
죽어있는 사람에게도 대사와 참회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해 자선, 대사, 참회의 행위를 하기를 명한다."-가톨릭 교리문답서
이 말은 무슨 말이냐하면,
내 가족중에 누가 연옥에 가있으면,연옥에 가있는 그의 기간과 고통을 경감시키기위해
살아남은 가족들이 그를 대신해서 대사와 참회를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연옥에 가있는 그 사람 자신은 자신이 연옥에 있을 기간과 고난을 경감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가족은 연옥에 가있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돈을 내고 대사와 참회를 대신해 주어야하는 부담까지 지게 됩니다.
이것은 제사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제사(미사)를 참석하는 것도 연옥에 가있는 사람의 연옥에 머무는 기간을 단축시키고 고통을 경감시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이 제사에 참석해서 돈을 내는 의무를 게을리하면,
연옥에 있는 사람의 기간과 고통을 줄이지 못하므로 그 사람이 고통받게 됩니다.
따라서, 연옥에 가있을 식구들을 생각하여서라도 미사에 참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협박이요 사기입니다.
왜 가톨릭이 성경에도 없는 연옥제도를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만한 것입니다.
그것은 가톨릭교도들을 성당에 붙들어매고, 돈을 계속해서 내게하기 위한 협박수단으로
연옥교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세상에 있는 사람과 저세상에 가있는 사람이 서로 돕고 연락할수 있다는
소위 "통교사상"이 왜 존재하는 지도 알만한 것입니다.
교리상으로 이세상과 저세상간의 통교가 가능해야
저세상에 간 사람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이지요.
또한 죽은 성인들이 우리 기도를 들어준다며,
각종 성인의 날을 정해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세상의 영혼과의 교통이라는 배교적 행위는
성경에서 금하고있는 명백한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신 18: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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