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로 오해한 카톨릭의 만행들!

3. 종교재판은 가톨릭의 교황의 지시로 이뤄졌다.

생명얻는 회개 2015. 10. 18. 17:06

기독교로 오해한 카톨릭의 만행들!

 

3. 종교재판은 가톨릭의 교황의 지시로 이뤄졌다.

 

   아래는, 두산백과사전에 나온 내용입니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게하기위해, 발만 태운다.

 

 

팔을 뒤로매달고, 다리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매달아 팔이 몸에서 떨어지게 만든다.

발만태우는 사람, 입안에 쇳물을 넣는장면등, 모두 신부들이 한짓이다.

 

 

담무스 상징 십자가를 섬기라고 강요한다.

 

 

임산부도 죽이고, 아이들은 공놀이로 창으로 꽃아 죽인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단자(異端者)를 탄압하기 위해 13세기에 전 그리스도교 국가를 대상으로 하여 제도화한, 비인도적인 혹심한 재판.
 


이단심문(異端審問)이라고도 한다. 단순한 ‘재판’이 아니라 이단자의 탐색 ·적발 ·체포 ·재판 ·처벌을 포함하는 이단자 박멸을 위한 일체의 활동을 그 임무로 하였다. 이단자에 대한 탄압은 4세기 그리스도 교회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당시 교회의 태도는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그 태도가 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남프랑스에서 일어난 대규모적인 이단운동이 교회에 준 심각한 위기감에서였다. 그 심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국가(지리적으로는 서유럽 전역과 그 속령)에서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위를 알아야 하는데, 요컨대 가톨릭교회는 ‘가톨릭(세계적 ·보편적이라는 뜻)’이라는 호칭대로 세계교회이며, 그 수장(首長)인 로마 교황은 서유럽 각국을 지배하는 서유럽의 원수(元首)이고, 교황청은 세계의 정부였다. 남프랑스의 이단운동이 세계정부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 하는 혁명운동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 당국이 받았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로마 교황은 일종의 십자군을 결성해서 20년에 걸친 이단자 박멸전쟁을 일으켜 어렵게 진압하였으나, 사후 대비책으로서 이단박멸 강화책을 강구할 필요성을 통감하였다. 그래서 이단자와 신학적 논쟁을 전개하는 데 충분한 학식과 종교적 열의를 가진 적격자를, 교황대리로서 치외법권적(治外法權的) 권한을 부여하여 전 그리스도교국에 파견, 전적으로 ‘이단 사냥’에 종사시키는 전문적이고도 항구적인 조직을 만들 것을 결의하였다.

 

 

1233년 4월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교황교서로서 이를 발표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를 ‘이단 심문관’에 선임하였다. 이같이 해서 제도화된 종교재판의 조직은 이단 심문관의 진주(進駐)에 따라 전 그리스도교 국가에 퍼졌으며, 특히 에스파냐에서의 종교재판 활동은 에스파냐 국왕의 적극적인 영합에 힘입어 가혹의 극을 이루었다. 종교재판 방법은 피고에게 유리한 변호는 일체 허용되지 않고 불리한 증언만 허용되었으며, 밀고는 비록 친자식 형제 사이의 것이라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받았다. 또한 다종다양하고 처절한 고문에 의해 자백이 강요되거나 날조되어, 용의자는 반드시 유죄판결과 처형으로 귀착되도록 짜여졌던 암흑재판이었다. 이단탄압은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종교재판은 각국의 국왕 ·영주(領主) ·지방자치단체 등의 세속적인 재판으로도 행해졌다. 그 후 종교개혁시대에 이르자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도 종교재판이 성행되었는데, 그 재판방법은 가톨릭측의 방법과 같았다. 이 종교재판 제도는 나라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1820년경에는 거의 폐지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숨길뿐, 1. 2차 대전도 모두 종교재판을 위하여 벌인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