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클레이 (RObert Samuel Maclay,)박사는 미국 감리교 볼티모어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847년에 중국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되어 복건성 복주를 중심하여 25년간의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872년 11월에 미국 감리교 총회에 출석하여 일본선교를 역설한 것이 인연이 되어 아직 선교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는 일본에 선교하기로 결의가 되자, 매클레이 목사가 추천되어 일본 선교사로 1873년 6월에 부임하였다.
그는 '전도는 교육과 병행하여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본 요꼬하마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동시에 동경에 영화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학원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매클레이 목사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을 왕래하는 신사유람단이나 유학생들 그리고 망명객들과 친하게 사귀었으며 특히 김옥균과 알게된 것이, 그가 한국을 방문할 때 얼마나 크게 도움되었는지 모른다.
1883년 민영익이가 우리나라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한국인을 만난 가우쳐(john F.Goucher)박사가 한국 선교를 목적하여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방문의 뜻을 연락하고 그후에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매클레이 목사가 한국을 방문한 당시에 상황을 알려주는 일기문이었다.
'1884년 6월24일 저녁에 나는 아내와 함께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우리는 일본에서 한국을 향하는 기선을 이용하여 유쾌한 항해를 하였다. 한국에 도착하여 기독교 사업을 위한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다행이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의 정부는 외국인을 추방하였으며 기독교를 아주 엄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을 초월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외국인의 입국을 허락하고 있다. 난관의 문은 개방돼 있으며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위하여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우리 내외는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분명히 설명하였으며 한국사람과 대단히 친밀하게 지냈다. 한국의 인구는 1천 2백만 정도이며 매우 건전하고 씩씩하다 우리 선교회가 곧 한국에 사업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어떤 한국 사람은 협력을 아끼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매클레이 목사의 방한은 한국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선교사로서 한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다. 고종 국왕으로부터 윤허된 소식을 가장 먼저 매클레이 목사에게 알려 준 사람은 윤치호는 19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주한 미국공사 푸우트의 통역을 맡고 있었으며 김옥균과 함께 매클레이 박사가 거처하는 숙소를 찾아 그 말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매클레이 목사는 너무나 반가워 혹 잘못 듣지나 않았나 하여 다시 되묻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고종의 윤허는 '교육과 의료사업'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나 그러나 이것만도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큰 수확이었다.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자 곧 미국 선교본부를 향하여 한국에서 교육 및 의료사업을 허락 받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지난날에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상복을 입는 등으로 변장을 하고 비밀리에 복음을 전달하였지만 앞으로는 변장하지 아니하고 떳떳하게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하여 선교를 시작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그는 중국과 일본에서 일생 선교사업에 헌신했으며 특별히 1884년에 60세 노구로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의 개시를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한 한국교회를 위한 공로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고로 매클레이 목사에게 '한국선교의 양 아버지'라는 이름이 붙어져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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