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조선 민족을 참으로 사랑하였던 헐버트 선교사의 조선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884년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드려 ,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습니다. 이 구체화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위한 중보기도와 선교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헤인 1885년부터 수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 하였습니다.
고종황제는 열강가운데 살아가야 할 ,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는데 , 모두다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헐버트 선교사입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오게되었습니다. 언어학교에서 5년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여 ,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안수를 받고 ,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어 죽는 아픔을 격지만 ,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습니다.
당시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될 무렵이었고 ,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 모든 세계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습니다.
헐버트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안관 문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국제 상황은 미 , 일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밀약의 내용은 '' 미국이 필리핀을 ,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 하는 것을 용인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또한 영국도 일본과 동맹체결로 한국강세를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 년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이승만 전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왔습니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1949년 8월에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1908년 떠나서 , 40년을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참으로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때가, 86세였고 하나님은 그의 방문기간에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장례식을 치뤄 주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주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 작년에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비어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습니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습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이 묘비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나는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조선 민족을 참으로 사랑하였던 헐버트 선교사의 조선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884년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드려 ,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습니다. 이 구체화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위한 중보기도와 선교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헤인 1885년부터 수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 하였습니다.
고종황제는 열강가운데 살아가야 할 ,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는데 , 모두다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헐버트 선교사입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오게되었습니다. 언어학교에서 5년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여 ,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안수를 받고 ,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들어 죽는 아픔을 격지만 ,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한국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습니다.
당시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될 무렵이었고 ,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 모든 세계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습니다.
헐버트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편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안관 문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국제 상황은 미 , 일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밀약의 내용은 '' 미국이 필리핀을 ,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 하는 것을 용인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또한 영국도 일본과 동맹체결로 한국강세를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 년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이승만 전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왔습니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1949년 8월에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1908년 떠나서 , 40년을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참으로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때가, 86세였고 하나님은 그의 방문기간에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장례식을 치뤄 주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주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 작년에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비어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습니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습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이 묘비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나는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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